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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해설 52회 (1)

정답>

'부여 송국리 유물 특별전'이라는 제목 아래 초대의 글이 나와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는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마련하였다. ()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민무늬 토기와 비파형 동검 등을 통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시대'는 청동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사진은 민무늬 토기의 일종인 '송국리식(송국리형) 토기'].

청동기 시대에는 의례 도구로 청동 거울과 청동 방울 등이 제작되었다.

오답 해설>

(사람들이)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계급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이다.

오수전*, 화천** 등의 중국 화폐로 교역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오수전: '오수(五銖)'의 두 글자가 표시된 중국의 화폐, 한 무제 때 처음 주조되어 위진 남북조, 수대에 걸쳐 사용되었다(초기에는 동전이었다가 후대에는 철전도 주조).

**화천(貨泉): 중국 왕망 대(기원후 8~23) 신나라 때부터 제조된 화폐(동전)

실을 뽑기 위해 가락바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가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 망명자들을 꾀어내어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의 군대가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속이고 도리어 준왕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위만(衛滿)(?~?)'임을 알 수 있다(기원전 194). 참고로 위만을 앞서 전국 시대(기원전 3세기 초)에 연이 고조선 서쪽(서방 2천여 리)을 점령한 뒤 연에 속하게 된 고조선 지역 토착 세력의 후손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고연인(故燕人)].

위만(?~?)은 주변의 진번과 임둔*을 복속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구체적 시기는 불확실).

*위만 조선 멸망 후(기원전 108) 위만에게 복속된 이 옛 지역에 다시 진번()과 임둔()이 설치된다(명목상으로만 설치되었다는 설 있음).

오답 해설>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가 파견한 군대와 맞서 싸운 고조선의 인물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재위 ?~기원전 108)이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한 인물은 고국천왕(재위 179-197, 9)이다(194, 고국천왕 16).

지방의 여러 성에 욕살, 처려근지 등(의 지방관 또는 지방 장관)을 둔 나라는 고구려이다.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이 영토(고조선 서방 2천여 리)를 빼앗긴 것은 기원전 3세기 초의 일이다.

정답>

삼국사기 데이터베이스에서 '신라본기'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6년에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한 점(545), '11년에 이사부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점령'한 점(550), '27년에 황룡사를 완공한' (566)*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검색창에 들어갈 왕은 신라의 제24대 왕인 진흥왕(재위 540-576)임을 알 수 있다.

*황룡사는 창건 이후에도 중건 공사가 계속 이어져 완공 시기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다.

진흥왕은 재위 29년인 568년에 마운령과 황초령에 순수비를 세웠다(마운령비, 황초령비).

흥왕 67 대가야정복, 황룡사, 한강유역확보(신주설치),
국사(거칠부),비열홀주설치(함흥,순수비), 품주설치
화랑제도화, 당항성확보 진흥대황한국비품화

오답 해설>

불국사 삼층 석탑(석가탑)이 건립된 것은 경덕왕 10년인 751년의 일이다.

첨성대를 세운 것은 신라 선덕 여왕 대(재위 632-647)의 일이다[633(선덕 여왕 2) 혹은 647(선덕 여왕 16)].

금관가야를 복속하여 영토를 확대한 것은 법흥왕 19년인 532년의 일이다.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도읍인 경주에) 설치한 것은 지증왕 10년인 509년의 일이다.

정답>

()'장사를 지낼 때 큰 나무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을 열어 놓아 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해서 ······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하였다. 온 집 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나무를 깎아 생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가리키는 나라는 골장제(가족공동묘제) 풍습을 갖고 있던 초기 국가, 옥저임을 알 수 있다.

*(): []을 넣기 위해 따로 짜 맞춘 매장 시설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에서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천군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 나라마다 별읍이 있으니 소도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그 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가리키는 나라는 삼한임을 알 수 있다.

삼한에는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다.

초기국가들의 생활상

부여 *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12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12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X 거수,,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오답 해설>

혼인 풍습으로 서옥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목지국 등 많은 소국들로 이루어졌던 나라는 삼한, 그중에서도 마한이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여러 가()들이 사출도를 별도로 주관한 나라 역시 초기 국가, 부여이다.

 

정답>

'(),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 추진'이라는 제목 아래 '문화재청은 ()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여기에는 김해 대성동, 고령 지산동, 함안 말이산 등 7개 고분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야'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가야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가야연맹

1.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2. 5C초 고구려 낙동강진출과 신라의 압박금관대가야

3. 고대국가발전못하고 백신의 정치군사적 압박으로 멸망

4. 철생산, 중계무역

5. 가야토기일본 스에키토기 가스

6. 초기12가야6가야연맹체

7. 멸망-본가야(법흥왕532), 대가야(진흥왕562)

 

오답 해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대(재위 501-523, 25)의 일이다.

집사부를 비롯한 14부를 둔 나라는 통일 신라이다(신문왕 대 완성).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백강에서 왜군과 함께 당군에 맞서 싸운 나라는 백제이다(663, 백강 전투).

 

정답>

'국보 제119호인 이 불상은 고구려의 승려들이 만들어 유포한 천불(天佛) 중의 하나로,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 연가(延嘉) 7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불상'은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539, 고구려 안원왕 9).

오답 해설>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금동 관음보살 좌상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채 왼손을 뒤를 짚는 윤왕좌(輪王坐) 자세[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영락(瓔珞)*장식이 덮혀 있는 바 라마교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영락: 구슬을 꿰어서 만든 장신구, 또는 구슬을 꿰어 몸에 달아 장엄하는 기구

발해의 이불병좌상이다. 석가불(석가여래불)과 다보불(다보여래불)이 만나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라의 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 좌상이다(국보 제79). 국보 제80호로 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 입상도 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 석탑(국보 제37) 해체 수리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금제 여래 좌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것으로 불상은 순금으로 만들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금동으로 따로 주조하여 결합시킨 것이다. 8세기 초 통일 신라 시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다.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반가 사유상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선지로 제시된 것은 복잡한 보관을 쓴 국보 제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다.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보관(寶冠), 즉 삼산관(三山冠)을 쓴,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도 있다.

정답>

()에서 '정관 16년에 ······ 여러 대신들과 건무가 의논하여 개소문을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개소문은 부병을 모두 불러 모아 군병을 사열한다고 말하고 ······ 왕궁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인 다음 대양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건무(建武)는 고구려 영류왕(재위 618-642, 27)으로,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연개소문(?~665)642(영류왕 25)에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에서 '건봉 원년에 ······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679)이 막리지가 되었다. 남생은 아우 남건·남산과 화목하지 못하여 각자 붕당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쫓겨 국내성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건봉 원년'은 당 고종의 연호로 666년에 해당한다. 하지만 '천남생묘지'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665(고구려 보장왕 24)이다.

복신(?~663)과 도침(?~661)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 것은 661(문무왕 원년)의 일이다(부여풍이 6619월에 일본에서 귀국).

오답 해설>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612(영양왕 23)의 일이다(살수 대첩).

당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한 것은 668(문무왕 8)의 일이다(고구려 멸망 직후). 이후 안동도호부는 신라의 반격으로 만주 이곳저곳으로 옮겨 설치되다가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758(경덕왕 17)에 최종 폐지되었다.

신라군이 매소성에서 당군을 격파한 것은 675(문무왕 15)의 일이다.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으로 임명된 것은 674(문무왕 14)의 일이다.

정답>

'이곳은 중국 양저우에 있는 이 인물의 기념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또한 당에서 쓴 글을 모은 계원필경을 남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 그은 '이 인물'은 고운 최치원(857~?)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최치원이 '격황소서(檄黃巢書)'(다른 말로 '토황소격문')를 지은 것은 당 희종 광명 2년인 881(신라 헌강왕 7)의 일이고, 최치원이 귀국한 것은 885(신라 헌강왕 11)이다.

최치원은 진성 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894, 진성 여왕 8).

오답 해설>

당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체결한 인물은 김춘추(604~661)이다(648, 진덕 여왕 2). 후일 신라의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으로 등극하였다.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여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 등을 지은 인물은 강수(?~692)이다.

*태종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629~694)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글

진골 귀족 출신으로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한 인물은 김대문(?~?)이다(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활동).

한자의 음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이두를 정리한 인물은 설총(655~?)이다.

정답>

'대무예가 대장 장문휴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를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 현종은 급히 대문예에게 유주(지금의 중국 북경)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고, 태복경 김사란을 보내 신라군으로 하여금 ()의 남쪽을 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이나 쌓여서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공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대무예, 곧 발해의 무왕(재위 719-737)이 당의 등주를 선제공격한 것은 재위 14년인 732년의 일이다. 또 대문예(?~?)는 무왕의 동생으로 당시 무왕과의 알력으로 당에 망명한 상태였고, 태복경 김사란(?~?)을 보내 신라군으로 하여금 발해의 남쪽을 치게 한 것은 이듬해인 733(신라 성덕왕 32)의 일이다[성덕왕(재위 702-737, 33].

발해는 (최고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 교육).

< 발해사 연구>

1. 698 대조영돈화건국 ~ 926 거란에 멸망

2. 발해에 관한 기록 : 제발해 조아동동

구당서(발해말갈전),신당서(발해전)
이승휴 제왕운기 최초 발해사 연구, 서사시로 구성
유득공 발해고 신라발해南北國주장,발해사만다룬최초사서
한치윤 해동역사 발해를 고,,,고려와같은 비중으로다룸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해, 신라 양국시대론
정약용 아방강역고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다룸
안정복 동사강목 삼국사기를 읽고 北國이 발해임을 밝혀냄
이종휘 동사 단군-기자-삼한-후조선본기와 따로 <세가>편을 서술하여면서 발해세가를 기자-부여-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킴

3. 36(당관제모방,독자성 )

정당성(대내상)-6(()충인의()지예신),선조성,중대성

4. 주자감(국립대)

5.중정대(감찰기관)-통신(사정부),고려(어사대),(사헌부)

6.지방제도-51562

7.발해가 우리민족이 세운나라라는 증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당과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국가로 인식

발해기록역사서

말갈족은 우리민족의 한 분파

당적요소 고구려적요소
36/주작대로/1562/10
관등제/동경성축조/잠자는미녀상/공주묘(벽돌무덤)
5경제/궁전지의온돌장치/천장의모줄임구조/사원지의불상양식/와당의연화문/석등/발해성터/발해음악/공주묘(굴식돌방)

오답 해설>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한 국가는 고려이다(922, 고려 태조 5). 서경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신라이다(536, 신라 법흥왕 23).

내신좌평 등 6좌평(16관등제)의 관제를 정비한 국가는 백제이다(260, 백제 고이왕 27)*. 6좌평 중 내신좌평이 정사암 회의 수장 역할을 겸하면서 '상좌평'으로 불렸다.

*고이왕 대로 보지 않고 4~5세기경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다거나 무왕 때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방관 감찰을 위해 외사정을 파견한 국가는 신라이다(673, 신라 문무왕 13).

정답>

위의 자료에 '()/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래서 평양 옛 도읍은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의 자료에는 '()/가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머리에 금책(金幘)*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 속 '()'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금책: 금으로 된 머리싸개, 고구려의 왕실 인사나 귀족이 썻다.

궁예는 후고구려 건국 후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설치하였다(904).

오답 해설>

임존성에서 당군을 격퇴한 인물은 백제의 흑치상지(630?~689)이다(백제 부흥 운동)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의 제2대 왕인) 신검(재위 935-936)에게 승리한 인물은 고려의 태조 왕건(877~943)이다(936, 고려 태조 19).

청해진을 통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한 인물은 신라의 장보고(?~846)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의 직을 받은 인물은 후백제의 견훤(867~936)이다(900). 참고로 고려 태조 왕건도 후당으로부터 검교태보 고려국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적이 있다(932)

정답>

맨왼쪽 말풍선에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옹립한 왕에 대해 말해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거란이 침략했을 대 개경을 떠나 나주까지 피란을 가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왕 때 초조대장경 조판을 시작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강조(?~1010)의 정변이 일어난 때는 고려 목종 12년인 1009년으로, 이때 강조는 목종(재위 997-1009, 7)을 시해하고 현종(재위 1009-1031, 8)을 옹립하였다.

강감찬(948~1031)이 귀주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현종 10년인 1019년의 일이다(귀주 대첩).








4도호부
8
5도양계





대장경

창수렴법






+
나성























고려대장경(초속8-부흥선)

1012~1087 1073~1096 1236~1251
1차대장경 교장(속장경) 2차대장경
초조대장경=정장 신편제종교장총록
(불서목록)
8만대장경,
재조대장경
거란대비
현종~선종
6000권을 대구부인사
몽고침입때 소실
남례사 일부전함
대각국사 의천
광의의미-1차대장경
흥왕사-교장도감
4700권인쇄, 선종X
몽고3차침입때 소실
송광사에 일부 전함
수기-대장경목록
몽고침입시
최우가 강화도-대장도감에서 조판
선원사에 보관
조선초-해인사로이전

오답 해설>

(몽골) 사신 저고여(?~1225)가 귀국길에 피살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윤관(?~1111)이 별무반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이다.

거란을 배척하여 만부교 사건*이 일어난 것은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의 일이다.

*만부교 사건: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이다.

서희(942~998)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것은 거란의 제1차 침입 시의 일이다(993, 고려 성종 12).

정답>

'구제도감'이라는 제목 아래 기능으로 '() 시대에 재해가 발생했을 때 설치한 임시 기구로서 전염병 퇴치, 병자 치료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백성을 구호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관련 사료로 '왕이 말하기를, 도성 내의 백성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이들을 치료하고,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매장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시대'는 고려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 예종 4년인 11095월 개경에서 역질이 발생하자 구제도감(구급도감)을 설치한 바 있다. 예종 원년(1106)에 설치된 동·서 제위도감, 충목왕 4(1348)에 설치된 진제도감, 공민왕 3(1354)에 설치된 진제색도 구제도감과 유사한 기관이다.

. 개경에 국립 의료기관인 동서 대비원을 설치한 것은 고려 문종 대이다(1049, 고려 문종 3).

.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를 운영한 것은 고려 광종 대이다(963, 고려 광종 14).

고려의 교통,통신,구호시설등 교통 역원제, 조운제
구호
시설
의창(성종, 흑창(태조)개칭)
상평창(성종, 물가조절기구, 조선때까지)
의료
시설
동서대비원(개경,문종),혜민국,구제도감(약국,예종)
기타 (상부상조),제위보(빈민구제,광종),학보(교육,태조)

오답 해설>

. 기근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종의 구황서(救荒書)인 구황촬요를 간행한 것은 조선 명종 대이다(1554, 명종 9)(흉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책).

. 호조에서 정한 사창절목에 따라 사창제를 시행한 것은 조선 고종 대이다(1867, 조선 고종 4). 기존의 환곡제를 개선해 마을 단위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해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고자 시행하였으나 187311월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유명무실화되고 말았다.

정답>

'고려의 태자가 배알하니 쿠빌라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고려의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말하기를, 고려는 비록 소국이나 20여 년간 군사를 동원하였어도 아직 신하가 되지 않았다. ······ 이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한 나라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의 태자가 몽골의 제5대 칸이자 중국 원의 시조(원 세조)인 쿠빌라이(재위 1260-1294, 칭기즈 칸 손자)를 배알한 것은 1259(고종 46)의 일이다. 여기서 고려의 태자는 곧 고려 원종(재위 1260-1274, 24)이다.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이 (상왕이 된 충선왕에 의해) 원의 연경[지금의 북경]에 세워진 것은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의 일이다. 충선왕은 익재[역옹] 이제현(1287~1367)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만권당으로 불렀다.

오답 해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가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명종 3년인 1173년의 일이다(김보당의 난).

묘청(?~1135)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고려 인종 13년인 1135년의 일이다(서경 천도 운동).

최충헌(1149~1219)이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한 것은 고려 명종 26년인 1196년의 일이다(이의민을 숙청하고 집권한 직후).

정답>

'국보 제18호인 ()은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 배흘림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축조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건물 내부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주심포 양식*으로 된 고려 시대의 또다른 목조 건축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있다.

*주심포(柱心包) 양식: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것을 가리킨다. 다포, 익공계보다 오래된 양식이다. 여기서 공포(栱包)란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이다.

오답 해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인 17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보물 제801).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다(1308, 충렬왕 34, 국보 제49). 참고로 수덕사는 삼국 시대 백제 말인 7세기 중엽에 창건되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 중기인 17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국보 제67).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국보 제15). 13세기 초 내지 중반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

위의 자료에 '주전도감에서 아뢰기를, 백성들이 비로소 동전 사용의 이로움을 알아 편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또한 이 해에 은병을 화폐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근으로 만들되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들었으며 속칭 활구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활구(은병)가 만들어진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아래의 자료에는 '저포, 은병으로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작은 일용품은 쌀로 가격을 계산하여 거래한다. 백성들은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편하게 여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숙종의 적극적인 화폐 유통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화폐 사용이 저조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송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나오는 자료로, 바로 앞 문장이 '대개 그 풍속이 점포는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노소, 관리, 공장들이 저마다 가진 것으로 교역하고, 화폐는 쓰지 않았다'이다.

고려 시대에는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의 시전을 감독하였다.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목종 대(재위 997-1009,7)로 추정된다(경시서 자체는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 그러다 고려 문종 대(재위 1046-1083, 11)에 이르러 경시서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이후 경시서는 조선 초에도 계속 존속되다가 세조 12(1466)에 관제를 개혁할 때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다.

오답 해설>

사무역(후시 무역) 중 하나인 책문 후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하였던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송상이 전국 각지에 송방을 설치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감자, 고구마 등이 구황 작물로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가 나타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최근 저술한 조선경국전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주례의 6전 체제를 참조하였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가상 인터뷰의 주인공은 삼봉 정도전(1342~1398)임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1394(태조 3)에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

정도전은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한 불씨잡변을 지었다(1394, 태조 3).

 

* 정도전(경고불조심)

경제문감,고려국사,불씨잡변,조선경국전,심기이편

 

오답 해설>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한 인물은 묘청(?~1135)이다.

지공거* 출신으로 9재 학당을 설립한 인물은 최충(984~1068)이다(1055, 고려 문종 9). 일명 '문헌공도', '시중최공도'라고도 불렀다.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인물은 풍기군수를 역임한 주세붕(1495~1554)이다(1543, 조선 중종 38).

충청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건의한 대표적인 인물은 잠곡 김육(1580~1658)이다(1651, 조선 효종 2).`

정답>

'(), 보물로 지정'이라는 제목 아래 '문화재청은 ()/를 고려 시대를 다룬 역사서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고려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사료로서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다는 점 등이 높게 평가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앞 왕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을 목적으로 조선 초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문종 대에 완성되었으며, 정인지 등이 쓴 서문에서는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의 범례('기전체')를 본받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말하는 '기전체' 역사서는, 조선 문종 원년(1451)에 편찬된 고려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듬해인 문종 2(1452)에 편찬된 고려사절요는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로 서술되었다. 고려사13975책 목판본이 2021217일자로 보물 제2115-4호로 지정되었다.

기전체 사서는 세가, 열전, , 연표 등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오답 해설>

남북국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역사서는 유득공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표현한 역사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1193, 고려 명종 23).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를 수록한 역사서는 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이다(1285, 고려 충렬왕 11).

단군 조선[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다룬 통사는 동국통감이다(1485, 조선 성종 16). 편년체 사서이다.

정답>

'일전에 좌정승 하륜(1347~1416)이 나에게 국정의 처리를 육조에서 직계하자고 건의하였다. 지금까지는 겨를이 없어 논의하지 못했으나, 이제 경들이 의논하도록 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은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재위 1400-1418)임을 알 수 있다. 6조 직계제가 시행된 것은 재위 14년인 1414년의 일이다.

문하부를 폐지하고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킨 것은 태종 원년인 1401년의 일이다(대신 견제책).

 

태종
이방원
*금인고명문제해결-명에게인정
*1차왕자의난(방원의난)2차왕자의난(방간,박포의난)
*왕권강화: 사병혁파, 6조직계제(세조), 의정부(정종)
*양전사업, 공도정책, 사민정책
*호패법-유민방지,인력확보,노비포함,3(세조,광숙인)
*주자소설치(계미자),억불숭유(도첩제강화),노비변정도감,5부학당(4부학당),신문고,거북선(귀선)건조,아악서
*서얼차별법,재가금지(양반수제재)
*지방제도정비(8,부목군현)
*태조실록,속육전,원육전,동국사략(권근)
혼일강리도(동양최고세계지도)

*6조직계제(왕권강화-태종,세조)vs 의정부서사제(세종)

 

오답 해설>

금속 활자인 갑인자가 제작된 것은 세종 16년인 1434년의 일이다. 태종 때 제작된 금속 활자로는 계미자가 있다(1403, 태종 3).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창설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선조 26)의 일이다.

인재 양성을 위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한 것은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정답>

()'대사헌 등이 아뢰기를, 정국공신은 책봉된 지 오래되었지만 폐주(廢主)의 총신(寵臣)도 많이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중에는 반정 때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지금이라도 이런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가 바로 서지 않을 것이니 삭훈해야 마땅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위훈 삭제 주장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519, 중종 14).

()에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두 당이 원수처럼 서로 공격하였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비방하자 김효원도 심의겸을 비난하여 각기 붕당이 나뉘어 대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사림이 김효원(1542~1590)을 지지하는 동인(신진 사림)과 심의겸(1535~1587)을 지지하는 서인(기성 사림)으로 나뉜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575, 선조 8).

외척 간의 대립으로 (대윤인) 윤임(1487~1545)이 제거된 것은 을사사화 때의 일이다(1545, 명종 원년).

 

* 사화정리

오사화 연산1498 의제문, 사초문제
자사화 연산1504 씨폐출사건
중종반정
묘사화 중종1519 훈삭제,모반음모의모락-조광조Kill
사사화 명종1545 위계승문제
정미사화 1547 윤원형 VS 윤원로형제권력다툼(괴벽서사건)
신임사화 1721 영조즉위전 노론4대신 처형(소론득세)

오답 해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그의 제자) 김일손(1464~1498) 등이 화를 입은 것은 무오사화이다(1498, 연산군 4).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성균관 앞 반수교 옆에 세워졌다.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 문제로 환국이 발생한 것은 숙종 15(1689)의 일이다(기사환국). 남인이 집권하였다.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져 김굉필(1454~1504), 정여창(1450~1504) 등이 처형된 것은 갑자사화이다(1504, 연산군 10).

정답>

'이 자료는 ()/가 지어 왕에게 바친 성학십도의 일부이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바탕으로 군주가 스스로 인격과 학문을 수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퇴계 이황(1501~1570)임을 알 수 있다. 성학십도가 저술된 것은 선조 원년인 1568년의 일이다.

이황은 (경북 안동 예안에서) 예안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1556, 명종 11).

오답 해설>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이다.

일본에 다녀와서 해동제국기를 편찬한 인물은 희현당[보한재] 신숙주(1417~1475)이다(1471, 성종 2).

유학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한 사변록*을 저술한 인물은 서계 박세당(1629~1703)이다(1680~1693).

*13년이 소요되었다. 대학사변록(1680), 중용사변록(1687), 논어사변록(1688), 맹자사변록(1689), 상서사변록(1691), 모시사변록(1693) 순으로 완성되었다.

가례집람을 저술하여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인물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1685, 숙종 11).

정답>

()'왕은 군사를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뒤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623년의 인조반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왕대비'는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 대비(1584~1632)이다.

()에서 '용골대 등이 왕을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자리로 나아가기를 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인조가 병자호란 때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 또는 '삼궤구고두례 (三跪九叩頭禮)', '삼전도의 굴욕')를 올린 사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637.1, 인조 15).

()에서 '왕이 김상용에게 도성의 일을 맡기고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강화로 피난해 들어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류,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의 신하들이 모두 따라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인조가 청 태종의 침략을 보고받고 강화도로 피난하려다 청군에 의해 길이 끊기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관련된 자료이다(1636.12, 인조 14).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진산의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어머니의 장례에도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태연하였으니, 정말 흉악한 자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 없다. 사학(邪學)을 따르는 죄인을 처벌하여 경계로 삼으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말풍선)는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에 발생한 '진산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진산 사건'이란 당시 전라도 진산(珍山)의 두 선비 권상연(1750~1791), 윤지충(1759~1791)이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워 발생한 사건으로, '신해박해'라고도 부른다.

 

3
사옥
해박해 정조1791 산사건윤지충(최초순교자)
유박해 순조1801 벽파가시파남인계탄압 사영백서사건
해박해 헌종1839 가작통법, 사윤음
인박해 고종1866 랑스9Kill,최대박해,병인양요원인

 

 

연표에서는 정조 즉위(1776)와 공노비 해방(1801) 사이인 '()'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1/3'청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왕자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3에는 '왕이 된 그는 성곽과 무기를 정비하고 군대를 양성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3/3에는 '하지만 냉혹한 국내외의 현실로 북벌은 미완의 꿈으로 남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에서 말하는 ''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재위 1649-1659)임을 알 수 있다.

효종 대에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을 위한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두 차례, 1654(변급 통솔)/1658(신류 통솔)].

 

효종-북벌운동(어영청)(나선정벌-변신-변급신유)

 

오답 해설>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의 일이다.

청과의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의 일이다.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된 것은 조선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수조권이 세습되던 수신전과 휼양전이 폐지된 것은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도록 한 직전법의 실시로 폐지되었다.

정답>

'우리나라 은화는 연경과의 무역에 모두 써버린다. 하늘이 낸 이 보화를 가지고 비단·식물·그릇·사치품 따위를 멀리서 사들여 와 하루도 못가서 소비해 버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나라에서 생산하는 은이 부족한 까닭에, 일본 은을 들여다가 간신히 채우려고 하지만 나라의 은이 모두 바닥이 난다. 병화(兵禍)가 생긴다면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화폐 유통에 비판적이었던 성호 이익(1681~1763)의 폐전론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익은 소농민을 몰락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 화폐 유통이라고 보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고추,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이 많아졌다.

오답 해설>

염포(지금의 울산)의 왜관이 열린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3포 개항, 1426(세종 8)].

(조선과 일본 사이에) 계해약조가 맺어진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세견선 50, 세사미두 200).

과전법이 시행된 것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의 일이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맡아보는 임시 관청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정답>

'왕은 늘 양역의 폐단을 염려하여 군포 한 필을 감하고 균역청을 설치하여 각 도의 어염·은결의 세를 걷어 보충하니, 그 은택을 입은 백성들은 서로 기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런 시책으로 화기(和氣)를 끌어올려 대명(大命)을 이을 만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주어진 자료는 조선 영조 26년인 1750년에 시행된 균역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재위 36년인 1760년에 준천사를 신설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당시 한성의 개천(지금의 청계천)의 홍수 피해가 막심하였다.

오답 해설>

대외 관계를 정리한 동문휘고가 간행된 것은 조선 정조 12년인 1788년의 일이다.

전제상정소가 설치되고 전분6등법이 제정된 것은 조선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면적의 차이(6등분)를 두었다.

총융청과 수어청이 창설되어 도성을 방어한 것은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1624(인조 2)/1626(인조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둔 것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의 일이다(안핵사 환재 박규수의 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