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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47회 (1)

정답> ①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는 주먹도끼와 함께 (가)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와 함께 돌날과 몸돌 등의 뗀석기도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구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슴베찌르개는 슴베*를 만들어서 창이나 화살 등에 꽂아서 쓰는 찌르개로, 찌르거나 가르는 데 사용된 뗀석기이다. 구석기 중기 이후부터 만들어졌다. 

*슴베: 자루나 살대 속에 들어가는 부분(사진에서는 아래 뾰족하고 얇은 부분)이다.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 거주하였다.

오답 해설>

②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은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③ 명도전을 이용하여 중국과 교역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④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은 것 역시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⑤ 의례 도구로 청동 방울 등을 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②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 (가)'라는 제목 하에 '연구소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았던 (가)를 주제로 한 역사 강좌를 3차에 걸쳐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강좌 내용으로 제1강 '쑹화강 유역의 자연 환경과 경제 생활'이, 제2강 '사출도를 통해 본 연맹 왕국의 구조'가, 제3강 '1책12법으로 알아보는 형벌 제도'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국가, 부여는 매년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이때 백성들은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 

오답 해설>

① 신성 구역인 소도를 둔 나라는 삼한이다.
③ 혼인 풍속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④ 부족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⑤ 목지국을 비롯한 많은 소국으로 이루어졌던 나라는 삼한 중 마한이다. 
 
 

 

정답> ④

'삼국의 발전과 경쟁'이라는 제목 하에, 맨왼쪽 말풍선에는 '비유왕과 눌지왕이 동맹을 체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433년에 체결된 나제 동맹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371년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맨오른쪽의 말풍선에는 '광개토 대왕이 5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400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다)-(가)'가 된다.

정답> ①

위의 사료에는 '왕이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화랑이 이처럼 제도화된 것은 신라의 제24대 왕인 진흥왕 때(재위 540-576)의 일이다(576, 진흥왕 37).

아래의 사료에는 '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사부(?~?)를 통해 대가야를 멸망시킨 사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진흥왕 때의 일이다(562, 진흥왕 23).

거칠부(502~579)가 국사를 편찬한 것은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진흥대황한국비품화

오답 해설>

②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라 헌덕왕 14년(822)의 일이다.
③ 이차돈(506~527)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 
④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뀐 것은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 대(재위 356-402)의 일이다(따라서 원래는 '내물 마립간'이 됨).
⑤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이 건립된 것은 신라 선덕 여왕 12년인 643년의 일이다.
 
 
정답> ①

'이 문화유산은 국보 제287호로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백제 왕실의 의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도교와 불교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표현된 걸작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문화유산은 백제의 금동 대향로임을 알 수 있다. 뚜껑 꼭대기에 봉황이 부착되어 있고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다.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답 해설>

② 가야의 토기로, '도기 기마 인물형 뿔잔'이다(국보 제275호). 완전 무장한 무사와 말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③ 백제의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이다.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무덤 속에 놓아둔 신상(神像)이다. 주로 짐승 모양을 하고 있다. 
④ 발해 정혜 공주 묘 앞에 설치되었던 돌사자상이다.
 신라의 고분 금관총(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이다. 원형의 대륜 정면에 3단의 출(出)자형 세움 장식 3개와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정답> ⑤

'(가)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라는 제목이 나와 있다. '속일본기에 '(가)의 왕 대무예가 고인의 등을 보내어 국서와 선물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기록된 내용으로 '고인의, 덕주, 사나루 등 24명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도록 하였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정중히 보내니 때때로 소식을 보내 우의를 두텁게 하고자 한다'가 나와 있다. 

발해는 거란도, 영주도 등을 통해 주변 국가와 교류하였다. 발해에는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가 있었는데, 당과는 조공도·영주도가, 거란과는 거란도가, 일본과는 일본도가, 신라와는 신라도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①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국가는 백제이다[6세기 초 무령왕 대(재위 501-523)].
② 교육 기관으로 태학과 경당을 둔 국가는 고구려이다. 태학이 설립된 것은 소수림왕 때이며(372, 
소수림왕 2), 지방 교육 기관으로 경당이 세워진 것은 장수왕 때의 일(427, 장수왕 15)이다.
③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국가는 신라이다(법흥왕 때 골품제 정비).
④ 화백 회의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한 국가는 신라이다.

정답> ②

(가)에서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자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이 남편 김품석을 따라 죽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춘추가 이에 한을 품고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그 원한을 갚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은 642년의 일이다.

(나)에서 '김유신 등이 황산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는 불리하고 병사들은 힘이 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계백의 황산벌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660년 7월의 일이다. 

신라가 당[태종]과 군사 동맹을 체결한 것은 648년(진덕 여왕 2)의 일이다(나당 동맹). 

오답 해설>

① 안승(?~?)이 보덕국의 왕으로 임명된 것은 674년(문무왕 14)의 일이다.
③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612년(고구려 영양왕 23)의 일이다(살수 대첩, 중국 수 양제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④ 신라군이 기벌포에서 적군(당군)을 격파한 것은 676년 11월의 일이다. 
 복신(?~663)과 도침(?~661)이 부여풍(?~?, 의자왕의 5번째 왕자)을 왕으로 추대한 것은 661년 9월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정답> ④
'지도와 같은 지방 행정 구역을 마련한 국가의 통치 제도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제시된 지도를 살펴보면, 중원경, 서원경, 남원경 등 5소경과 한주, 삭주, 명주 등 9주가 보인다. 따라서 제시된 지도 속 지방 행정 구역은 9주 5소경으로 통일 신라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관리 감찰을 위해 사정부를 둔 것은 신라이다. 태종 무열왕 6년인 659년의 일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사정부의 경(卿)을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백관을 감찰하는 기능을 가진 관서가 이때부터 있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즉 감찰 업무의 중요성이 커져 659년에 사정부로 격상됨, 동시에 최고 책임자를 '영(令)'으로 상향 조정).
오답 해설>
① 중앙군을 2군 6위로 조직한 국가는 고려이다(고려 성종 때 완성). 
② 지방관으로 안찰사를 파견한 국가도 역시 고려이다. 참고로 안찰사는 지방에 상주한 것이 아니라 지방을 순시하고 감찰하는 임시직이다. 
③ 중앙 관제를 3성 6부로 정비한 국가는 발해이다.
 유학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한 국가 역시 발해이다. 참고로 신라의 사정부와 같은 감찰 기능을 담당한 발해의 (감찰) 기구는 중정대이다.
정답> ④

'()는 설총(655~?)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놀던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로 만들어 화엄경의 구절에서 이름을 따와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인물'은 통일 신라의 화쟁국사 원효(617~686)임을 알 수 있다.

원효가 지은 저술 중에 금강삼매경론이 있다(그 외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화엄경소 등 다수).

오답 해설>
① 부석사를 창건한 인물은 원묘국사 의상(625~702)이다(677, 신라 문무왕 16).
② (강진 만덕사에서 법화 신앙을 중심으로) 백련결사를 주도한 인물은 고려의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이다.    
③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인물은 혜초(704~787)이다(727, 신라 성덕왕 26).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한 인물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1090년대).

정답> ②
'우리 박물관에서는 전주 동고산성 발굴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동고산성에서는 전주성(全州城)명 수막새 등 견훤이 세운 (가)와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회를 통해 후당, 오월과 교류한 (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국가'는 견훤(867~936)이 세운 후백제임을 알 수 있다. 
견훤은 927년에 벌어졌던 고려와의 공산(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 전투에서 고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반면 3년 후인 930년에 벌어졌던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는 고려군에 패배]. 
오답 해설>
① 광평성(국정 최고 기관) 등의 정치 기구를 둔 국가는 궁예(?~918)가 세운 후고구려이다. 
③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발해이다(발해 무왕 대).
④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전개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한 국가는 궁예의 후고구려이다(905).
 
정답> ③
왼쪽 말풍선에는 '훈요 10조를 지어 후세에 전하노니, 밤낮으로 펼쳐보아 영구히 귀감으로 삼도록 하라'는 말이 나와 있다.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의 일이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신 최승로, 시무 28조를 작성하여 장계와 함께 따로 봉하여 올립니다'는 말이 나와 있다. 고려 성종 원년인 982년의 일이다. 
노비안검법이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7년인 956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정방이 (최우에 의해) 설치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② 별무반이 (윤관에 의해) 편성된 것은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이다.
④ 독서삼품과가 시행된 것은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정동행성 이문소가 폐지된 것은 고려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참고로 정동행성 이문소의 폐지는 사실상 정동행성의 폐지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정답> ①
'벽란정은 예성항 연안에 있으며, 개경에서 30리 떨어져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신의 배가 연안에 닿으면 군사들이 금고(金鼓)*를 울리며 조서를 맞아 인도하여 벽란정에 들어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상황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예성강 하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금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군(軍)에서 호령하는 데 사용하던 징과 북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부터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인삼, 담배가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내상, 만상 등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덕대가 물주에게 자금을 받아 광산을 경영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대동법이 시행된 것도 조선 후기이다(1608~1708).
정답> ④
오른쪽 말풍선에 '이 책은 이규보의 문집으로 전집 41권, 후집 12권으로 구성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시, 가전체 소설 등 다양한 작품이 실려 있어 그의 문학 세계와 역사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책'은 고려의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임을 알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에는 고구려의 건국 서사시인 동명왕편이 실려 있다. 
오답 해설>
①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처음으로) 지칭한 책은 영재 유득공(1748~1809)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② 단군을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기록한 책은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이다(1281, 충렬왕 7).
③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로 서술된 대표적인 책은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를 들 수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의 계보가 수록된 책은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이다(1287, 충렬왕 13).
정답> ③
왼쪽 말풍선에는 '서경 임원역의 지세는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하니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옮겨 가면 천하를 아우르게 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짐이 서경에 행차하여 지세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상황'은 묘청(?~1135)의 서경 천도 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당시의 왕은 고려의 제17대 왕인 인종(재위 1122-1146)].
 
연표에서는 이자겸의 난(1126)과 무신 정변(1170) 사이인 (다)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①
'고려 초기에 제작된 (가)에 대해 알려' 달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불상으로 '은진 미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또 '불상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는 말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다고 인정받아 2018년에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은 논산 관촉사 석조[은진] 미륵보살 입상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② 경주 팔공산의 관봉 석조여래 좌상이다. 통일 신라의 불상으로, 머리 위에 갓 모양의 모자가 얹혀 있어 이른바 '갓바위 불상'이라고도 불린다.
③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으로, 백제의 불상이다.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이다. 천연암벽을 적절히 활용하여 불신(佛身)을 표현하였다. 불두(佛頭)는 따로 만들어 얹었다. 왼쪽의 마애불은 둥근 갓을 쓰고 왼손을 어깨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연꽃 줄기를 붙잡고 있다(미륵으로 추정). 오른쪽의 마애불에서는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다. 옷자락의 흐름이 바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답> ②
'화면의 그림은 천산대렵도에 그려진 변발과 호복을 한 무사'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이러한 머리 모양과 복장이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한 시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천산대렵도는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13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변발과 호복'은 몽골의 풍습이자 고유 의상으로, 이는 곧 몽골풍이 유행한 원 간섭기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원 간섭기는 원종의 환도령으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시작(개경 환도),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원 간섭에서 탈피].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것은 원 간섭 이후의 일이다(1279, 충렬왕 5). 또 권문세족 역시 원 간섭기의 지배 세력을 칭하는 명칭이다.
오답 해설>
① 윤관이 동북 9성을 쌓은 것은 고려 예종 2년인 1107년의 일이다.
③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것은 고려 의종 24년인 1170년의 일이다(무신 정변).
 초조대장경을 만들어 국난 극복을 기원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다. 현종 2년인 1011년에 발원하여 선종 4년인 1087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으나 몽골의 제2차 침입 때(1232) 소실되었다. 
⑤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한 것은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의 일이다.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는 '장영실 님, 국왕의 명으로 이번에 시각을 스스로 알려주는 자격루를 제작하셨는데, 작동 원리를 설명해' 달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지렛대의 힘으로 굴러간 쇠구슬이 인형을 작동시켜 종, 북, 징을 울리게 하고 팻말로 시각을 알리도록 고안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로, 세종 16년인 1434년에 장영실(1390년경~?), 김조, 이천 등이 만들었다. 따라서 제시된 '국왕'은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재위 1418-1450)임을 알 수 있다.
(화약과 화기의 제조를 맡아보던 임시 관청이었던)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창왕 원년인 1389년에 조준의 상소에 의해 폐지되었다.
오답 해설>
① 집현전이 실질적인 학문 연구 기관으로 바뀐 것은 세종 2년(1420)의 일이다.
② 농사직설이 편찬된 것은 세종 11년인 1429년의 일이다.
③ 칠정산 내·외편이 편찬된 것은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주자소에서 갑인자가 주조된 것은 세종 16년인 1434년의 일이다.
정답> ②
'조선의 건국 과정'이라는 제목 하에 (가)에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의 일이다. 
(나)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건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양으로 천도한 1394년(태조 3)의 일이다. 
(다)에는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을 제정하여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의 일이다.
 
따라서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다)-(나)'가 된다. 

정답> ②
맨왼쪽 말풍선에는 '직전(職田)의 폐단으로 이번에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수조권을 가진 관리가 농민에게 전세를 직접 거두면서 과다하게 수취하는 것이 문제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래서 소재지의 관청에서 그 해 생산량을 조사하여 전세를 거둔 후 지급하기로 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제도'는 성종 원년인 1470년에 시행된 관수 관급제임을 알 수 있다. 
성종 16년인 1485년 (세조 때부터 착수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오답 해설>
① 현량과를 통해 신진 사림이 등용된 것은 조선 중종 때의 일이다(1519, 중종 14). 정암 조광조(1481~1519)의 건의로 시행되었다. 
③ 영창 대군(1606~1614)이 사사된 것은 광해군 6년인 1614년의 일이고, 인목 대비가 (서궁에) 유폐된 것은 광해군 5년인 1613년의 일이다. 대북파가 영창 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로 인해 발생한 일이다(1613, 광해군 5). 그런데 영창 대군은 사사(賜死)*된 것이 아니라 (기록에 따라 이견이 있으나)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강화부사 정항이 굶겨 죽였거나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증살(蒸殺)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사: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는 것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의 난이 발생한 것은 두 차례이다. 태조 7년인 1398년 8월에 일어난 것이 첫 번째이고(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무인정사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 함), 1400년 1월에 일어난 것이 두 번째이다(제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 함).
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정답> ⑤
'조선 시대에 유학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된 교육 기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부분 관아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대성전 중심의 제사 공간과 명륜당 중심의 강학 공간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입학 정원은 고을의 위상과 크기에 따라 달랐으며, 학생들은 소학과 사서오경을 주로 배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교육 기관은 향교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향교에) 교수와 훈도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좌수와 별감을 두고 운영한 기관은 유향소(향청)이다.
② 지방의 사림 세력이 주로 설립한 교육 기관은 서원이다.
③ 소과에 합격해야 입학 자격이 주어진 교육 기관은 성균관이다.
 흥선 대원군에 의해 대부분 철폐된 교육 기관은 서원이다(1864, 고종 원년).
정답> ③
(가)에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을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주석을 달아 왕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말미암아 연산군 4년(1498)에 발생한 무오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나)에는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공신은 이미 1년이 지난 오래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으므로 지금 (이를) 신속히 고치지 않으면 뒤에는 개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내용이 나와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가 펼친 여러 개혁 정치 중 '위훈 삭제'와 관련된 것으로, 중종 14년(1519)에 발생한 기묘사화의 주요 빌미가 된 사실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것은 1506년의 일이다. 참고로 중종은 당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었다.
오답 해설>
①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명종 2년인 1547년의 일이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소윤) 세력이 경기도 과전의 양제역에 붙여진 벽서를 빌미로 을사사화(1545) 이후 잔존한 반대파 인물들(대윤 세력과 사림계)을 재차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후일 소윤 일파 몰락 후 벽서 사건 자체가 무고임이 공인되었다.
②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이다(동서 붕당).
 성삼문 등이 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것은 세조 2년인 1456년의 일이다(사육신 사건).
 (인조반정 후)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인조반정 이듬해).
 

정답> ④
'이 무기는 불랑기포라고 하는데, 서양에서 명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불랑기포는 (가) 당시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과 싸워 평양성을 탈환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평양성 전투, 1593.1).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에서 적군을 크게 물리쳤다(제1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이듬해인 1593년 6월) 
오답 해설>
① 김상용(1561~1637)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② 정봉수(1572~1645)가 용골산성에서 항쟁한 것은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1627, 인조 5).
③ 최영(1316~1388)이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고려 우왕 때의 일이다(1376, 고려 우왕 2). 홍산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이다.
 이종무(1360~1425)가 (왜)적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한 것은 세종 원년인 1419년의 일이다.
 

정답> ⑤
'양역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한 호포와 결포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하는 것으로 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경들은 1필로 줄였을 때 생기는 세입 감소분을 채울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하라'는 앞의 말은 곧 영조 26년인 1750년에 시행된 균역법임을 알 수 있다. 
균역법 시행으로 말미암아 줄어든 세입을 채우기 위해 결작(1결당 쌀2두), 해세·어장세·염세·선박세, 선무군관포(부유한 양민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1년에 군포 1필)를 징수하였다.
오답 해설>
① 수신전과 휼양전이 폐지된 것은 직전법 시행 때의 일이다(1466, 세조 12).
② 토지 1결당 미곡 12두를 부과한 것은 대동법 시행 때의 일이다(1608~1708).
③ 양전 사업을 시행하여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 제국 때의 일이다(1899~1904,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시행).
④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전세를 부과한 것(연분9등법)은 공법 시행 때의 일이다(1444, 세종 26). 덧붙여 토지 비옥도를 기준으로 토지 면적을 6등급으로 나누었다(전분6등법).
정답> ②
조선 시대 국왕을 알아 맞히는 문제라고 한다. 1단계 힌트에서 5단계 힌트까지 나와 있다. 1단계 힌트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이라는 점이고[정조(재위 1776-1800)], 2단계 힌트는 초계문신제 시행'이다(1781, 정조 5). 3단계 힌트는 '신해통공 실시'(1791, 정조 15), 4단계 힌트는 '규장각 설치'이다(1776, 정조 즉위년). 
그리고 제시된 선지들 중에서 5단계 힌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② 수원 화성 건설'이다(1794.2~1796.9).
오답 해설>
①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이다.
③ 나선 정벌이 단행된 것은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이다. 
④ 간도 관리사가 파견된 것은 1903년(고종 40)의 일이다. 정확하게는 1902년 6월 이범윤(1856~1940)을 간도 시찰원이라는 명목으로 파견하였다가 이듬해인 1903년 7월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
⑤ 이인좌(1695~1728)의 난이 발생한 것은 영조 4년인 1728년의 일이다. 소론과 남인 일파(과격파)가 연합해 경종의 죽음에 의혹이 있고, 영조의 혈통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권 탈취를 기도한 난이다.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정답> ④
'경상도 영덕의 오래되고 유력한 가문은 모두 남인이고, 이른바 신향(新鄕)은 서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요즘 서인이 향교를 장악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고 있던 중, 주자의 초상화가 비에 젖자 신향이 주자의 초상화와 함께 송시열의 초상화도 숨기고 남인이 훔쳐 갔다는 말을 퍼뜨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향촌 사회에서 신향이 구향과 마찰을 빚는 내용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신향과 구향 사이에 벌어진 향전(鄕戰)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ㄴ. 중인(여기서는 역관)이 시사(詩社)에서 활발하게 문예 활동을 벌인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ㄹ.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4년(1678) 이후의 일이다(조선 후기, 허적과 권대운의 건의). 
오답 해설>
ㄱ. 염포(울산)가 개항한 것은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3포 개항, 부산포(동래)·염포·제포 또는 내이포(웅천, 현재의 진해)].
ㄷ. 시전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고려와 조선 초의 관청은 경시서이다.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에 평시서로 개칭되었다(갑오개혁 때 혁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