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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47회 (2)

정답> ④
'이 책(『성호사설』)은 (가)이 평소 학문을 연구하여 기록한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것을 정리한 백과전서류의 저서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인사문에는 노비제, 과거제, 벌열(閥閱) 등을 나라를 해치는 6가지 좀벌레로 규정하여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중농학파(경세치용학파)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벌열'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것, 또는 그런 집안'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세도가', '권세가 있는 양반'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성호 이익은 「곽우록」에서 토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
오답 해설>
① 북경에 다녀온 후 연행록*을 남긴 인물은 다수이나, 실학자 중에서 대표적인 두 인물로 담헌 홍대용(1731~1783)과 연암 박지원(1737~1805)을 들 수 있다(각 '을병연행록'/'열하일기').
*연행록: 청에 다녀온 사신이나 수행원이 남긴 사행 기록(使行記錄).
②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이다.
③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1816, 순조 16)
⑤ 북학의를 저술하여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한 인물은 초정 박제가(1750~1805)이다(1778, 정조 2).
정답> ②
'조선 후기 회화전'이라는 제목 하에 왼쪽 말풍선에는 '이 그림은 겸재 (가)가 한양 근교의 경치를 그린 경교명승첩 중 한 작품이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 산수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금강전도를 비롯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에서 말하는 '(가)'는 겸재 정선(1676~1759)임을 알 수 있다. 
제시된 선지 중에서 ②가 '금강전도'와 함께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이다(1751년작, 황혼에 접어든 일흔 여섯의 나이에 완성). 참고로 자료 속 그림의 명칭은 '광진'*이다(1740~1741년작). 
*광진: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을 그린 작품 
오답 해설>
①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총석정이다(1795년작, 을묘년화첩). 
③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영통동구도이다(1757년경, 송도기행첩 중의 한 점). 서양화 기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이 반영되었다.  
④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이다(1844년작).
⑤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다(1447년작). 

정답> ①
'이 불상은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불상 안에 있는 비기(秘記)가 세상에 나오는 날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예언 사상이 안동 김씨 등 왕실의 외척을 비롯한 소수의 특정 가문이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독점한 시기에 널리 퍼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시기'는 19세기 전반의 '세도 정치 시기'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을사사화가 발생한 것은 명종 즉위년인 154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홍경래(1871~1812)가 (평안북도에서) 난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의 일이다. 
③ (삼정의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임시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것은 철종 13년인 1862년의 일이다(진주 농민 봉기 시  안핵사로 파견되었던 박규수의 건의).
④ 최제우(1824~1864)가 동학을 창시한 것은 철종 11년인 1860년의 일이다.
⑤ 이양선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의 일이다(기록상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영조 시기부터지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통상을 요구하면서 조선 연해를 찾은 이양선이 급격하게 증가).
정답> ⑤
'프랑스에서 의궤 모사본 발견'이라는 제목 하에 '프랑스에서 1900년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궤 모사본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 중 '헌종대왕국장도감의궤'와 '효현왕후국장도감의궤'를 프랑스인이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모사본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종 3년인 1866년 10월에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발생한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의궤'란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책을 가리킨다. 
병인양요가 발생한 주된 병인으로는 동년 2월에 (프랑스 국적의) 천주교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것을 들 수 있다(병인박해*, 1866). *사실 병인박해는 해를 넘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① 고종이 국외 중립을 선언한 것은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렀던 1904년 1월 23일의 일이다(동년 2월 8일 러일 전쟁 발발).
② 함경도 관찰사(조병식)가 방곡령을 선포한 것은 고종 26년인 1889년의 일이다.
③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한 것은 1868년(고종 5) 5월의 일이다. 
④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이끄는 군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은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던 1882년 6월의 일이다. 
정답> ①
(가)에는 '왕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2살이어서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친아버지인 흥선군을 높여 대원군으로 삼아 모든 정사에 참여하게 하고 신하의 예와는 달리 대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재위 1863-1907)임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1820~1898)이 이때 집권하여 이후 각종 개혁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참고로 [신정]익황후*, 이른바 '조대비' 1866 2월에 수렴청정을 거두어[철렴] 이후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신정]익황후: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왕비(1808~1890)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다.
(나)에는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잘못을 탄핵하기를, 만약 그 자리가 아닌데도 국정에 관여하는 자는 단지 그 지위와 자리의 녹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원군이 분노하여 양주 직곡으로 물러나자 권력이 모두 (왕비인) 민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흥선 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한 사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873.11, 진정한 고종의 친정 체제로 전환).
따라서 이는 곧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묻는 문제이다.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흥선 대원군이) 사창제를 실시한 것은 고종 4년인 1867년의 일이다. 기존의 환곡제를 개선해 마을 단위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해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고자 한 것이다(1873년 11월 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유명무실화됨).
오답 해설>
② 속대전이 편찬된 것은 영조 22년인 1746년의 일이다.
③ 장용영이 설치된 것은 정조 17년인 1793년의 일이다. 본래 정조 9년인 1785년에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 부대를 창설하였고, 1793년에 이르러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하였다.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으며, 내영은 한성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④ 계해약조가 체결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것은 숙종 38년인 1712년의 일이다.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는 '현재 조선에 가장 시급한 외교 사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렇게 말한 사람으로 김홍집(1842~1896)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러시아를 막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을 가까이 하고,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며,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른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이라는 외교 정책(사실상 러시아 견제책)을 주장한 것으로, 황준헌(1848~1905)이 말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로써 제시된 자료는 고종 17년인 1880년 5월(음력)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이 당시 주일 청국 외교관[참찬]이었던 황준헌을 만나 나눈 대화임을 알 수 있다. 황준헌은 자신의 주장이 담긴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주었는데, 김홍집이 귀국 후 이를 고종에게 바쳤다(1880.9, 고종이 조정의 신하들은 물론 널리 유림들에까지『조선책략』을 읽어보게 하고 의견을 구함)
ㄷ. 이만손 등이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아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과 수교하려는 개방 정책을 조선 조정이 채택하려는데 반대하여 일종의 집단 척사 상소인) 영남만인소를 올린 것은 1881년(고종 18) 2월의 일이다.
ㄹ.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것은 1882년(고종 19) 5월의 일이다.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오답 해설>
ㄱ.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고종 12년인 1875년 9월의 일이다. 
ㄴ. 전국에 척화비가 건립된 것은 고종 8년인 1871년 5월의 일이다.

정답> ③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제목 하에 답사 장소가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영국군 묘지'로 러시아 견제를 구실로 무단 점령한 영국군의 묘지'라는 소개글이 제시되어 있다. 1885년 4월 영국군이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에 있는 섬)를 불법 점령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887년 2월까지 주둔). 두 번째는 '임병찬 순지비'로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1912.9) 독립운동가 임병찬(1851~1916)이 유배되어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라는 소개글이 제시되어 있다. 임병찬은 191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된 바 1916년 5월 순국하였다. 참고로 임병찬이 스승으로 모신 인물이 바로 면암 최익현(1833~1906)이다.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는 '얼마 전에 정부가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제1차) 갑오개혁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894.6~12). 오른쪽 말풍선에는 '은본위제 채택을 포함한 여러 안건을 처리했다고 들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건양이라는 연호를 채택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제1차 갑오개혁 때 채택한 연호는 '개국'이다(청의 종주권 부인). 청의 연호를 더는 사용하지 않고 개국 기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답 해설>
① 과거제를 폐지한 것은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② (고문과) 연좌제를 금지한 것 역시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③ 공사 노비법을 혁파한 것 역시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④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 것도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참고로 봉건적 악습 중 하나인 '조혼(早婚)*'도 폐지하였다. 
*조혼: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하는 것
 

 

정답> ③
'떨어진 녹두꽃'이라는 제목 하에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서 그들이 추구한 사회의 모습을 알아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장면별 구성 내용에서 #3(장면 3)으로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다'가 나와 있고, 그 사이에 #4로 '(가)'가 나와 있으며, #5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동학 농민군과 정부가 전주 화약을 체결한 것은 1894년 5월 8일이고,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된 것은 동년(1894년) 12월 2일의 일이다.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은 1894년 11월 9일의 일이다(우금치 전투). 이후 6~7일간 혈전을 벌였으나 동학 농민군은 끝내 화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대패하였다. 
오답 해설>
① 해월 최시형(1827~1898)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것은 1863년의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철종 14년인 1863년에 수운 최제우(1824~1864)로부터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 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었고, 동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사실 이와 관련해 많은 학문적 논의가 있음).
②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이) 백산에서 집결하여 4대 강령을 발표한 것은 1894년 3월 25일~26일의 일이다(고부 백산 대회). 백산은 현재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이다. 
④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이용하여 (중앙 경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1894년 4월 23일의 일이다. 그 전인 동년 4월 6일~7일에 황토현(황토재) 전투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격퇴한 바 있다. 
 서울에서 교조 신원을 위한 복합 상소를 올린 것은 1893년 2월의 일이다(서울 복합 상소).
 
정답> ⑤
(가)에는 '왕이 경복궁을 나오니 이범진, 이윤용 등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홍집 등이 군중에게 잡혀 살해되자 유길준, 장박 등은 도주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종이 1896년 2월 11일(양력) 러시아 공사 웨베르(베베르)와 친미파(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 파천'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에는 '오늘 대군주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에 "짐이 신민에 앞서 머리카락을 자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만국과 나란히 서는 대업을 이루라"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단발령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발령이 시행된 것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로, 양력으로는 1896년 1월 1일에 해당한다(음력 1895년 11월 15일 공포).
(다)에는 '광화문을 통해 들어온 일본 병사들이 건청궁으로 침입하여 왕후를 수색하고, 마침내 왕후를 찾아내어 시해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895년 10월 8일(양력)(음력으로는 1895년 8월 20일)에 있었던 '을미사변'(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시된 자료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나)-(가)'가 된다.

정답> ③
'여러 신하와 온 백성이 수십 차례나 글을 올려 한 목소리로 반드시 황제의 칭호로 높이라고 간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백악산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서 나라 이름을 '대한'이라고 정하고 올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조서]는 대한 제국 선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대한 제국 수립, 1897년 10월 12일). 
군 통수권 장악을 위하여 원수부가 설치된 것은 고종 36년[광무 3년]인 1899년 6월의 일이다(황제권 강화).
오답 해설>
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된 것은 고종 18년인 1881년 4월의 일이다.
② 청에 영선사로 김윤식 (일행)이 파견된 것 역시 고종 18년인 1881년 9월의 일이다(~1882.11).
④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인 육영 공원이 설립된 것은 고종 23년인 1886년 9월의 일이다.
 개화 정책을 담당하는[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년 12월의 일이다.
정답> ③
'독립 유공자의 명패를 부착하는 행사가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영국에 있는 베델의 손녀 집에서 열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베델은 양기탁과 함께 (가)을/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영국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이 우강 양기탁(1871~1938)과 함께 창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이다(1904.7).
대한매일신보는 강경한 항일 논조를 펼친 바 고종의 '을사늑약 무효 선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박문국에서 발간한 신문으로는 근대적 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를 들 수 있다(각 1883/1886).
② 최초로 상업 광고를 실은 신문은 한성주보이다(1886).
④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은 독립신문이다(1896).
 일장기를 삭제한 손기정 사진을 게재한 신문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이다. 손기정 선수가 1938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하였을 때 두 신문사가 이를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답> ②
'이곳은 도산 ○○○ 기념관'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대화창에는 '신민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말, '서북 학회를 조직했다'는 말, '흥사단을 창설했다'는 말이 차례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도산 안창호(1878~1938)임을 알 수 있다. 안창호는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 결성(1907.4), 서북·관서·해서 지역 출신들에 의한 서북 학회 조직(1908.1), 샌프란스시코에서의 흥사단 창설(1913.5)에 모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다. 
1908년 9월에는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오답 해설>
① 국문 연구소의 위원으로서 국문 연구에 힘쓴 인물은 주시경(1876~1914)이다(1907.7).
③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인물은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1901~1932)이다(1932.1).
④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독립 투쟁을 서술한 인물은 백암 박은식(1959~1925)이다(1920.12).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인물은 당시 군사장을 맡았던 왕산 허위(1854~1908)이다(1908.1). 13도 창의군 총대장[창의 대장]을 맡은 이인영(1868~1909)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위해 귀향하였다. 
정답> ⑤
탐구 내용으로 '에네켄 농장의 열악한 노동 조건, 독립군 양성을 위한 숭무 학교 설립, 성금 모금을 위한 독립운동 지원'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에네켄 농장'은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하였던 유카탄 지역의 에네켄 재배 농장을 가리킨다. 멕시코 이주 한인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노동하여, 당시 멕시코 한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에네켄이란 용설란과의 식물로,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 북서부를 포함한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원산지이다. 또 숭무 학교는 멕시코 이주 한인들이 유카탄의 메리다 지역에 설립한 '독립군 양성' 학교이다. 1910년 11월 지역회 회장 이근영(?~?)의 주도로 수십 명의 한인 청년을 모아 사관(士官)을 양성하고자 세웠다.
 

정답> ②
말풍선에는 '이 동상은 박재혁 의사의 1920년 의거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김원봉, 윤세주 등이 만주 지린성에서 창설한 (가)에 가입한 후, 고서상으로 위장하여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폭탄을 터뜨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말풍선 속 '(가)에 들어갈 단체는 1919년 11월에 창설된 의열단임을 알 수 있다. 의열단원 박재혁(1895~1921)은 1920년 9월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행하였다.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가 집필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1923.1)
오답 해설>
①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후원한 단체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민간 신문사들이었다.
③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대승을 거둔 단체는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등의 독립군 연합 부대였다(1920.10).
④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1919.9).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민권 신장을 추구한 단체는 독립 협회이다(1898.3~10).

정답> ②
'오늘 종로 1가 사거리 큰 길에서 모인 동기를 진술하라'는 질문에, '나는 어제 오후 5시 무렵 경성부 남대문로에 있었는데, 자동차에서 뿌린 독립 선언서를 습득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 선언서의 내용을 진술하라'는 질문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인 것을 선언함 등의 내용이었다'고 하면서 '조선 민족 대표자 33인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임을 알 수 있다. 
3·1 운동 결과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동년 4월 11일에 수립).
오답 해설>
①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 아래 계획된 것은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이다.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계획되었는데, 사회주의 세력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학생 운동 세력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진행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 학생 운동이 대중적 차원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탄압한 대상은 신민회이다(1911.9). 이로써 신민회 온건파의 실력 양성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신민회 강경파들은 이미 1909년경부터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추진). 
④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1929.11).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 등의 구호를 내세운 것은 농촌 계몽 운동이다. 동아일보가 주도하였다(1931~1934). 
정답> ④
'어린 동무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와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는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 선언문'이라는 문구가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20년대 천도교 소년회에서 추진된 소년 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도교 소년회는 방정환(1899~1931)의 주도로 김기전(1894~1948), 이정호(1906~1938) 등이 1921년 5월에 발족시켰는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소년 운동은 천도교 세력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오답 해설>
① 통감부의 탄압으로 중단된 사회 운동은 국채 보상 운동이다(1908.7). 참고로 통감부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1906년 2월에 설치되었으며, 1910년 10월 조선 총독부의 설치로 폐지되었다. 
② 김광제(1866~1920), 서상돈(1850~1913) 등이 주도한 사회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 보상 운동이다(1907.2~1908.7)
③ (일제가) 서당 규칙을 제정하여 우리 민족의 '개량 서당 설립 운동'을 방해한 것은 1918년 3월의 일이다. 서당의 설립을 허가제로 전환하여 반일적인 서당의 설립을 막으려는 것이다. 
 평양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사회 운동은 물산 장려 운동이다(1920.8).

정답> ⑤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이 발생한 애국반 회보에 설린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일제가 중일 전쟁 이후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시기에 사회를 통제하던 모습을 잘 보여 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림의 문구는 '여행 갈 때는 반드시 각반과 몸뻬를 잊지 말자'와 '출정 군인의 유가족에게 힘이 되자'는 내용이다. 참고로 여기서 '각반'이란 '걸음을 걸을 때 발목 부분을 가뜬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돌려 감거나 싸는 띠'를 말한다('행전'이라는 말로 순화)
조선 총독부에 의해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이 만들어진 것은 1940년 10월이다. 따라서 제시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에 해당한다.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공포된 것은 1941년 2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미쓰야 협정이 체결된 것은 1925년 6월의 일이다. 미쓰야 협정이란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중국 동삼성[만주]의 군벌인 장쭤린 사이에 체결된 협약으로 만주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이를 반드시 일본 영사관에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② 토지 조사 사업이 실시된 것은 1910년대이다(1912~1918).
③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된 것은 1924년의 일이다. 이때는 예과를 설치한 것이고 2년 뒤인 1926년에 본과를 설치하였다.
④ 헌병 경찰 제도를 시행한 것은 1910년대이다. 
정답> 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양세봉(1896~1934)의 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남만주 일대에서 조직된 (가)의 총사령으로 중국 의용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 혁명당 소속의 조선 혁명군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혁명군은 1930년대 초 영릉가, 흥경성 등지에서 일·만 엽합군을 격퇴하였다. 
오답 해설>
② 중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는 김좌진(1889~1930)이 지휘한 북로 군정서군이다.
③ 자유시 참변 이후 세력이 약화된 독립군 부대는 대한 독립군단(서일)이다(1920년 12월 결성된 독립군 통합 부대). 
④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군사력을 강화한 '독립군 부대'는 의열단이다(1932). 
⑤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독립군 부대는 한국 광복군이다. 참고로 한국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1943년 8월 10여 명의 비전투 대원들(인면전구공작대)을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다(한·영 군사 상호 협정서 체결). 이들은 인도 캘커타에서 특수공작전과 대적선전방송과 관련된 훈련을 받고 1944년 2월부터 그와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정답> ④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이 각각 자기 당을 해소하고 새로 한국 독립당을 창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 3당이 1당을 조직하게 된 최대 이유는 원래 당의(黨義), 당강(黨綱), 당책(黨策)으로든지 독립운동의 의식으로든지 역사적 혁명 노선으로든지 3당 서로가 1당을 세울 만한 통일적 가능성을 충족하게 내포하였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처럼 (1930년대 중국 관내의 민족 연합 전선의 실패 후-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좌우 세력들이 이합집산한 좀 복잡한 사실들이 엮혀 있다) '민족 진영' 3당의 통합을 통해 한국 독립당이 새롭게 창당된 것은 1940년 5월의 일이다. 참고로 한국 독립당이 처음으로 창당된 것은 1930년 1월이다.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발표된 것은 1941년 11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것은 1919년 5월의 일이다(독립 청원서 제출).
② 참의부(1923), 신민부(1924), 정의부(1925)가 만주 지역에 성립된 것은 1920년대 전반의 일이다. 
 (한인 애국단 소속)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것은 1932년 4월 29일의 일이다.
⑤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표 회의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것은 1923년 1월의 일이다(~5월).
정답> ③
'당시 정부가 100억 달러 수출 달성을 축하하고자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한 조형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지 7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상징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7년의 일이다. 
(박정희 정부가)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강경 진압한 것은 1979년 8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6.12)
②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의 일이다(2007.6). 참고로 협정이 발효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2년 3월이다.
④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3.8).
⑤ 대통령 직속 자문 기구인 노사정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8.1, 사실 이때는 엄격하게 말해 김영삼 정부 시기이지만(김대중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998년 2월 25일) 당선인 신분으로 제안하여 노사정 위원회가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 시기의 일로 취급함)

정답> ⑤
(가)에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1945.12)에 의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처음으로 구성된 것은 1946년 3월 20의 일이다(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5월 9일까지 회의를 진행하다 결렬, 이른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임). (나)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이듬해인 1947년 5월에 다시 열린 미소 공동 위원회(이른바 '제2차 미소 공동 워원회')가 재차 난관에 봉착되자 미국 측이 조선의 독립과 통일 문제를 유엔 총회로 이관한 것은 1947년 9월의 일이다(동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 총선거 실시안이 가결).
따라서 제시된 자료 속 '㉠'은 미소 공동 위원회이다. 미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에 참여할 단체의 범위를 두고 논쟁하였는데,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여 최종 결렬되고 말았다. 
오답 해설>
① 반공을 국시로 내건 혁명 공약을 발표한 것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박정희에 의해 설치된 '군사혁명위원회'이다(이후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명칭 변경).
② 정치인들의 활동을 규제하고, 언론 기관을 통폐합한 것은, 전두환에 의해 설치된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이른바 '국보위')이다(1980.5). 
③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 의원 선출권을 행사한 것은 유신 헌법에 의해 설치된 통일 주체 국민 회의이다(1972.12).
④ 조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고 전국 각지에 인민 위원회를 조직된 기구는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도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줄여서 '건준')이다. 참고로 건준이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은 1945년 9월 6일의 일이다(미군은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거부).
 

정답> ③
(가)에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처음으로 구성된 것은 1946년 3월의 일이다(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나)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난관에 봉착되자 미국 측이 조선의 독립과 통일 문제를 유엔 총회로 이관한 것은 1947년 9월의 일이다(동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 총선거 실시안이 가결).
(여운형, 김규식 등의 중도파가 주도한)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한 것은 1946년 10월 7일의 일이다(좌우 합작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946년 7월). 
오답 해설>
①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 협상에 참석한 것은 1948년 4월의 일이다. 
②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구성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이다. 
④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6월의 일이다.
⑤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인 5·10 총선거가 실시된 것은 1948년 5월의 일이다.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는 '이번 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이 이끈 신한 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켜 제1 야당으로 급부상'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여당인 민주 정의당과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표출된 것 같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구신민당과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 소속 인사를 중심으로 신한 민주당(이하 신민당)이 창당된 것은 1985년 1월이고, 한 달 뒤에 치러진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1985.2.12)를 통해 제1 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이전의 제1 야당은 민주한국당(민한당)].
제1 야당이 된 신민당은 이후 직선제 개헌론을 12대 국회의 중요 의제로 설정하고 동년(1985년) 12월 민주제 개헌 1천만 명 서명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개헌 운동에 나섰다. 참고로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3년 12월에도 장준하를 비롯한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등 각계 재야 민주 인사들의 주도로 '유신 헌법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오답 해설>
① 의원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진 것은 제3차 개헌 때의 일이다(1960.6).
② 3·15 부정 선거로 여당 부통령 후보(이기붕)가 당선된 것은 1960년 3월의 일이다. 
③ 신군부에 의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된 것은 1980년 5월 17일의 일이다(일종의 5.17 쿠데타).
⑤ 긴급 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3·1 민주 구국 선언이 (각계 재야 민주 인사들에 의해 명동 성당에서) 발표된 것은 1976년 3월의 일이다. 

정답> ③
'국토 균형 발전'의 일환으로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추진' 정책을 펼쳤으며, '국민 보건 증진'을 위해 '질병 관리 본부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과거사 정리'의 일환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구성'된 사실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를 추진한 정부는 노무현 정부임을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 통일 노력'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부 말기인 2007년 10월의 '10·4 남북 정상 선언'을 들 수 있다. 
기존의 국립보건원이 질병 관리 본부로 확대, 개편되어 출범한 것은 2004년 1월이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2005년 12월의 일이다. 또 '행정 중심 복합 도시 추진'은 원래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였던 '신행정수도 건설'이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중단되어 변경된 것이다[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해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발족(2003.4)되었던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로 명칭이 변경(2005.4)].
오답 해설>
① 남북 기본 합의서가 서명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1.12).
② 남북 조절 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일이다(1972.11).
④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이 채택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1991.12).
⑤ 이산가족 고향 방문이 최초로 성사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의 일이다(19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