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48회 (1)

정답> ④

'우리 박물관에서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가)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주요 전시 유물로 가락바퀴(왼쪽), 갈돌과 갈판(오른쪽)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가락바퀴는 중앙의 둥근 구멍에 축이 될 막대(가락)를 꽂아 한 방향으로 회전시키면서 실을 뽑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 유물이다. 뼈바늘과 함께 옷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오답 해설>

① 주로 (석회암)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사람들이)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②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③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 역시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①

'이 나라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존비(尊卑)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모든 대가들도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 회의하여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국가,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 초기국가들의 생활상


*부족장(마가,우가,저가,구가)가신(대사,사자,대사자)
-5부족연맹,4출도지배,연맹국가
4대금법
형사취수
흰옷숭상
순장,112
-금와전설
-뇌옥(감옥)
-중국과친선
(고구려)
고구려 5(소계절관순)
大加가신(사자,조의,선인)
수상(상가,대로,패자)관리
예서제(서옥제)
=데릴사위제
동맹,112
*형사취수제
감옥X
절약과침략
옥저 X 거수,,읍군,삼로
*지리적이유로 중국문화수입을 하지 못하여 군장국가까지만 머무름
예부제
=민며느리제
가족묘,세골장
두벌묻기쌀항아리
오곡,맥포
해산물풍부
동예 책화,방직기술
무천(10)
단궁,반어피
과하마
삼한 제정분리(신구문화갈등완충지)
종교(천군-소도)
정치(신지,읍차,부례)
제천행사(5,10)
두레,상투,문신
벼농사
 

오답 해설>

②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③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④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삼한(三韓)이다.

정답> ③

'이곳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10호분 발굴 조사 설명회 현장'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형 덩이쇠 40매와 둥근고리큰칼, 화살촉 등 13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번 발굴로 김수로왕이 건국하였다고 전해지는 (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전망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가야임을 알 수 있다.

③은 가야의 철제 판갑옷과 투구이다.

오답 해설>

① 백제의 산수문전이다. 보물 제343-1호이고, 193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산수문양을 얕은 부조(浮彫)로 판형을 떠서 구워 만들었다.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산수문의 특징과 함께 초기 산수화의 시원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단에는 수면을, 중간의 넓은 부분에는 선산(仙山)으로 생각되는 산악을, 상단에는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표현하였고, 산악의 중앙 하단과 그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건물과 스님 같은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둥근 삼산(三山) 형식의 토산(土山)은 약간 도톰하게 부푼 모양으로 처리하고, 윤곽은 선조(線彫)로 강조하여 나타냈다.

② 백제의 칠지도이다. 백제의 제14대 왕인 근구수왕(재위 375-384)이 왕자로 있을 때 일본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냈다(372, 근초고왕 27, 『일본서기』). 

④ 백제의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이다.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무덤 속에 놓아둔 신상(神像)이다. 주로 짐승 모양을 하고 있다. 

⑤ 발해의 정혜 공주 묘 앞에 있었던 돌사자상이다. 

정답> ⑤

(가)에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벌잔 비지(比智)의 딸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에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왕이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을 만나 그들과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가)는 493년 신라(소지 마립간)와 백제(동성왕) 사이에 맺은 혼인 동맹[제2차 나제 동맹이라고도 함, 모대(牟大)는 백제 동성왕의 이름, 말다(末多) 또는 마제(摩帝)라고도 부름]을 가리키고, (나)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전사한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백제(성왕)가 신라(진흥왕)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한 것은 551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한 것은 미천왕 14년인 313년의 일이다.

② 백제가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은 침류왕 원년인 384년의 일이다.

③ 신라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를 격퇴한 것은 내물 마립간 45년인 400년의 일이다.

④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태조왕 4년인 56년의 일이다. 

정답> ②

'당에 파견되었던 이찬 김춘추가 오늘 무사히 귀국하였는데, 김춘추가 그곳에서 큰 환대를 받았고, (당) 태종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춘추의 대당 외교 결과 '나당 동맹'이 결성된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나당 동맹이 결성된 것은 648년의 일이므로, 연표에서는 (나)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③

재위 1년(원년, 681)에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재위 2년(682)에는 '국학을 세'웠고, 재위 5년(685)에는 '서원소경을 설치'하였다(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조직). 마지막으로 재위 9년(689)에는 '달구벌로 천도하려 한'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달구벌은 지금의 대구로, 이상의 자료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라의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임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은 재위 7년인 68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재위 9년인 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였다. 

신문 7 9서당정비(중앙군정비),95소경정비(지방제도정비), 녹읍x(관료전지급),국학, 예작부, 공장부,
김흠돌모반사건, 설총-화왕계
 

오답 해설>

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의 일이다.

②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신라 진흥왕 37년인 576년의 일이다.

④ 최고 지배자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한 것은 신라의 제17대 왕인 내물 때(재위 356-402)부터의 일이다(『삼국유사』). 참고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19대 왕인 눌지 때(재위 417-458)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는 '이 탑은 진성 여왕 때 해인사 부근에서 있었던 전란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최치원이 작성한 탑지(塔誌)를 보면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사진 속 탑은 경남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 길상탑'이다. 1965년 탑의 내부에서 157개의 소탑(小塔)과 최치원(857~?)이 지은 4장의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는데[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여기에 진성 여왕(재위 887-897) 9년인 895년에 발생한 초적(草賊)의 약탈과 전란에서 불교 사원을 지키다 희생된 승려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삼층 석탑(길상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등 (신라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은 신라 말의 일이다(889, 진성 여왕 3).

오답 해설>

① 빈민 구제를 위해 의창이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5년인 986년의 일이다.

③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661년의 일이다(661.9).

④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1135년(고려 인조 13)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는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때이며 서경 천도론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넓게 보면 서경 천도론은 고려 태조 때부터 거의 모든 고려 왕들이 신봉하였던 풍수론인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지덕쇠왕설: 지덕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 곳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진다는 설

⑤ 부처의 힘을 빌려 외침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이 조판된 것은 1236년(고종 23)에서 1251년(고종 38)까지이다.

정답> ①

'이것은 일본 나라현 헤이조큐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목간에 보이는 고려라는 명칭을 통해 일본은 이 국가를 고려, 즉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목간에는 '고려에 보낸 사절이 귀국하였으니, 천평보자 2년(758) 10월 28일 위계를 두 단계 올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758년은 발해 문왕 22년에 해당한다. 

발해는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중정대-감찰 기구).

오답 해설>

②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신라이다(536, 신라 법흥왕 23).

③ 군사 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편성한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다.(685, 신라 신문왕 5).

④ 골품에 따라 관직 승진에 제한을 둔 국가 역시 신라이다(신라 법흥왕 대 골품제 정비).

⑤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국가 역시 신라이다(5세기 이전부터 실시 추정). 

정답> ②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가 답사 주제로 나와 있다. 경로는 '천마총 → 첨성대 → 동궁과 월지 → 분황사지 → 불국사'가 제시되어 있다. 

자장(590~658)의 건의로 건립된 것은 첨성대가 아니라 황룡사 9층 목탑이다(643, 선덕 여왕 12). 

오답 해설>

① 천마도가 수습된 곳은 천마총 내부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3년 고분의 동쪽 중앙에서 2장의 장니[말다래] 천마도가 발견되었다. 

③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가 출토된 곳은 동궁과 월지(東宮과 月池)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5년 동궁과 월지 바닥에서 발견하였다.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한자어로 '목제주령구(木製酒令具)'라고 한다. 

④ 분황사지에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이 남아 있다. 옳은 설명이다. 즉, 분황사지 모전 석탑이다(634, 선덕 여왕 3).

⑤ 불국사 경내의 삼층 석탑(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1966년 탑 2층 탑신부에서 사리함과 함께 발견되었다. 

정답> ②

(가)에는 '태조는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맞춰 싸운 공산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927.11).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이다. 

(나)에는 '[태조를] 신검의 군대가 막아서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가 견훤과 함께 병사들을 사열한 후 ······ 신검이 양검, 용검 및 문무 관료들과 함께 항복하여 오니, 태조가 그를 위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936년 9월에 있었던 일리천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리천은 지금의 경북 구미 선산에 있는 하천이며, 고려 왕건은 일리천 전투를 승리로 이끔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경순왕 김부가 경주의 사심관이 된 것은 왕건에게 귀부한 직후의 일이다(935.11). 왕건은 항복해온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그 지방의 자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오답 해설>

① 최승로(927~989)가 시무 28조를 건의한 것은 고려 성종 원년인 982년의 일이다.

③ 대공(大恭)이 난이 일어난 것은 신라 혜공왕 4년인 768년의 일이다(『삼국사기』). 대공의 난이란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에 있던 대공(?~768)과 그의 아우 아찬(阿飡) 대렴이 무리를 모아 일으킨 난이다. 이를 시작으로 96각간(角干)이 왕궁파(친왕파)와 김대공파(반왕파)로 나뉘어 왕권을 놓고 싸운 이른바 '96각간의 난'이 이어졌다. 참고로 각간(角干)은 본래 신라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96각간은 각간의 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 난을 일으킨 귀족과 진압한 귀족 전체를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④ 궁예(?~918)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 것은 911년의 일이다.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가 시행된 것은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정답> ①

'이 지도는 개경 환도 결정에 반발하여 봉기한 (가)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것입니다. 강화도와 진도에서는 배중손, 제주도에서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항쟁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군사 조직'은 고려의 삼별초임을 알 수 있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령이 내려지자 이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최우(집권 1219-1249)에 의해 만들어진 좌별초, 우별초와 최항 집권기(1249-1257)인 1254년(고종 41) 이후에 만들어진 신의군으로 조직되었다(1232~1273).

오답 해설>

②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창설된 군사 조직은 광군이다(947, 고려 정종 2).

③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은 별무반이다(1104, 고려 숙종 9).

④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맡는 예비군이었던 군사 조직은 조선의 잡색군이다(조선 세종 대에 정비).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으로 구성되었다. 

⑤ 옷깃 색을 기준으로 9개의 부대로 편성된 군사 조직은 신라의 9서당이다. 녹금서당·자금서당·비금서당은 신라인, 황금서당은 고구려인, 백금서당·청금서당은 백제인, 적금서당·벽금서당은 보덕국인[보덕성민(報德城民)], 흑금서당은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

정답> ②

'고려 시대의 교육'이라는 제목하에 '제1강 관학의 정비', '제2강 사학의 융성', '제3강 관학 진흥책'이 나와 있다. 이어 관학 진행책으로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다'와 '(가)'가 제시되어 있다. 서적포(書籍鋪)는 일종의 출판 기관으로, 숙종 5년인 1101년에 설치되었다. 

전문 강좌인 7재가 개설된 것은 예종 4년인 110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당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신라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의 (견당)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선덕 여왕 9년인 640년의 일이다. 신라 후기에는 6두품 이하의 자제들이 당에 유학하였고, 그곳에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학 기간은 10년 정도였으며, 기간이 차면 귀국하였다. 유학하는 학생 수가 많을 때에는 무려 100여 명에 달하였다.

③ 사액 서원에 서적과 노비를 지급한 것은 조선 명종 5년인 1550년부터의 일이다. 중종 38년인 1543년에 세워진 백운동 서원(풍기 군수 주세붕)이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④ 글과 활쏘기를 가르치는 경당이 설립된 것은 고구려 장수왕 15년인 427년의 일이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단행한 직후 지방에 세운 교육 기관이다. 

⑤ 관리 채용을 위해 독서삼품과가 시행된 것은 (통일)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정답> ③

'바야흐로 금이 번성하여 우리 왕조로 하여금 신하를 칭하게 하고자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론이 뒤섞여 어지러웠는데, 공이 홀로 간쟁하기를, ······ 여진은 본래 우리 왕조 사람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되어 천자를 조회하였고 국경 부근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왕조의 호적에 속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어찌 우리 왕조가 도리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에 권신(權臣)이 왕명을 멋대로 하였으므로 이에 신하를 칭하고 이로 인해 서표(誓表)를 올렸다. 진실로 인종의 본심이 아니었으니 공이 심히 부끄럽고 슬프게 여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료 속 상황은 금의 군신 관계 요구에 당시 권신인 이자겸(?~1126)의 굴욕 외교로 인하여 고려가 이를 받아들인 것을 가리킨다(1126, 고려 인종 4). 금은 고려의 이와 같은 '칭신상표(稱臣上表)'의 글을 받고는 앞으로 사신의 왕래에 관한 모든 의례(儀禮)는 요와의 구제(舊制)에 따르도록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참고로 출처가 윤언이 묘지명으로 되어 있는 바 윤언이(?~1149)는 바로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 9성을 설치한 윤관(?~1111)의 아들이다. 

연표에서 제시된 상황이 나타난 시기는 별무반 설치(1104)와 무신 정변(1170) 사이인 (다) 시기에 해당한다.

정답> ③

개요에 '고려의 회의 기구로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이 모여 주로 국방과 군사 문제를 다루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과 함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또 관련 사료로 '판사(判事)는 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로 임명하였으며, 사(使)는 6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으로 임명하였다. ······ 무릇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사(使) 이상의 관료가 모여서 의논하였으므로 합좌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기구'는 도병마사임을 알 수 있다. 

도병마사는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었다(1279, 충렬왕 5).

오답 해설>

① 수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한 기구는 조선의 한성부이다.

②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로 불린 기구는 조선의 홍문관이다(1478, 성종 9). 경연을 주관하였으며,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렀다.

④ 화폐와 곡식의 출납 회계를 담당한 (고려의) 기구는 삼사(三司)이다. 

⑤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있었던 기구는 대간(臺諫)이다. 중서문하성의 낭사(낭관, 3품 이하)와 감찰 기관인 어사대의 관원이 대간을 이루어 언론 역할을 하였다. 

 

정답> ⑤

말풍선에는 '이것은 경상북도 칠곡군 선봉사에 있는 비석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문종의 아들인 그가 국청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그'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속 비석은 말풍선에서 제시된 대로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이다(보물 제251호)

의천은 천태종의 통합 이론으로 이론 연마와 수행을 함께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시하였다. 

오답 해설>

① 보현십원가를 지어 불교 교리를 전파한 '그'는 균여(923~973)이다(광종 대인 963년과 967년 사이에 지음)

②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수선사 결사를 조직한 '그'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다(1190, 고려 명종 20).

③ 선문염송집을 편찬하고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그'는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다(1226, 고려 고종 13). 혜심은 지눌의 제자이자 지눌을 이어 조계종의 2세(世)가 되었다. 

④ 불교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저술한 '그'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다(1281, 고려 충렬왕 7).

정답> ④

위의 사료에는 '경종 원년에 처음으로 직관(職官)과 산관(散官) 각 품이 전시과를 제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종 원년인 976년에 시행된 시정 전시과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사료에는 '문종 30년, 양반 전시과를 다시 고쳤다. 제1과는 중서령, 상서령, 문하시중으로 전지 100결과 시지 50결을 주며, ······ 제18과는 한인(閑人), 잡류(雜類)로 전지 17결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문종 30년인 1076년에 시행된 경정 전시과임을 알 수 있다. 

건원중보가 발행되어 금속 화폐의 통용이 추진된 것은 고려 성종 15년인 996년의 일이다. 건원중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으로, 통용에는 실패하였다. 

오답 해설>

① 솔빈부의 말이 특산물로 거래된 국가는 발해이다.

② 청해진이 국제 무역 거점으로 번성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③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이 (경주에) 설치된 것은 신라 지증왕 10년인 509년의 일이다. 참고로 효소왕 4년인 695년에는 서시전과 남시전이 설치되었다. 

⑤ 설점수세제의 시행으로 민간의 광산 개발이 허용된 것은 조선 효종 2년인 1651년의 일이다.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고려 시대 민생 안정을 위해 시행한 정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간 말풍선에는 '감염병 확산 등에 대처하기 위해 구제도감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 예종 4년인 1109년 개경에서 역질이 발생하자 구제도감(구급도감)을 설치한 바 있다. 

국산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된 것은 조선 세종 15년인 1433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물가 조절을 위해 상평창을 설치하였다(993, 고려 성종 12). 옳은 내용이다.

② 병자에게 의약품을 제공하는 혜민국이 있었다(1112, 고려 에종).

③ 환자 치료와 빈민 구제를 위해 동·서 대비원을 두었다(1049, 고려 문종 3).

⑤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다(963, 고려 광종 14).

정답> ①

'조선의 법궁, (가)'라는 제목하에 '이곳은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린다는 뜻을 지닌 궁궐이다(삼봉 정도전이 이름 지음). 궁궐 안에는 국왕의 정무 공간과 왕실의 생활 공간 등이 조성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주요 관람 경로로 '광화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과 교태전 → 향원정 → 건청궁 → 경회루'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경복궁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고종이 아관 파천 이후 환궁한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이다(1897.2).

오답 해설>

② 경복궁은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창건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조선 태조 즉위 2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 1395년(태조 3)에 완성하였다.

③ 조선 물산 공진회 개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옳은 설명이다(1915.9-10).

④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장소이다. 옳은 설명이다. 건청궁이다(양력 1895.10.8). 

⑤ 일제에 의해 궁궐 안에 조선 총독부 건물이 세워졌다. 옳은 설명이다. 1918년 7월에 경복궁 구내에 총독부 청사가 착공되어 1926년 10월에 낙성되었다. 참고로 조선 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청사 중앙돔 랜턴을 해체한 것을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 이듬해인 1996년 11월 13일 청사의 지상 부분의 철거를 완료되었다.

정답> ⑤

'선유(先儒)가 불씨(佛氏)의 지옥설을 논박하여 말하기를, ······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째서 한 사람도 지옥에 들어가 소위 시왕(十王)*이란 것을 본 자가 없단 말인가? 그 지옥이란 없기도 하거니와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글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글(불씨잡변 →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 1394)을 쓴 삼봉 정도전(1342~1398)의 것임을 알 수 있다(출처도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으로 나옴). 

* 시왕(十王):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재판하는 열 명의 대왕 

정도전은 태조 3년인 1394년에 조선경국전을 지어 바쳤다. 

오답 해설>

①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은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의 일이다. 계유정난은 후일 세조로 등극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 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② 일본에 다녀와서 해국제국기를 편찬한 인물은 신숙주(1417~1475)이다(1471, 성종 2).

③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인물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1649, 효종 즉위년).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주장하였다.

④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성학십도를 지은 인물은 퇴계 이황(1501~1570)이다(1568, 선조 원년).

정답> ④

말풍선에는 '이 우표 속 인물은 15세기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생몰연대가 '?~1465년'으로 나와 있고, 주요 활동으로 '세종 때 문과 급제', '갑인자 제작에 참여', '천문의상을 교정·제작'이 제시되어 있고, 저서로 '제가역상집', '교식추보법' 등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인물은 문신이자 천문학자였던 이순지(?~1465)이다. 여기서 갑인자는 세종 16년인 1434년 갑인년에 만든 구리 활자이고, 천문의상(天文儀象)이란 천문 관측 기구를 가리킨다. 또 제가역상집(1445)과 교식추보법(1459)은 둘 다 천문서이다.

이순지는 정인지, 정초, 정흠지, 김담 등과 같이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다(1444, 세종 26).

오답 해설>

① 종두법을 소개한 인물은 지석영(1855~1935)이다[우두신설, 1885(고종 22)].

②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1789, 정조 13).

③ 동의보감을 완성한 인물은 허준(1539~1615)이다(1610, 광해군 2).

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인물은 고산자 김정호(?~1866)이다(1861, 철종 12).

정답> ③

(가)에서 '갑자년 봄에, 임금은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나)에는 '정문형, 한치례 등이 의논하기를, 지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차마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 마땅히 대역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해서 그 죄를 분명히 밝혀 신하들과 백성들의 분을 씻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에는 '정유년 이후부터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 자전(慈殿)은 밀지를 윤원형에게 내렸다. 이에 이기, 임백령 등이 고변하여 큰 화를 만들어 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종 원년인 1545년에 발생한 을사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라)에는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에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더니 ······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중종 14년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가)-(라)-(다)'가 된다. 

정답> ③

왼쪽 말풍선에는 '소현 세자께서 돌아가셨는데 시신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가 흘러 나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전쟁에 패하여 청에 인질로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실 때도 건강하셨던 세자께서 어찌 두 달 만에 그리되셨는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 세자(1623~1649)가 청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었다[1636.12(인조 14)~1637.1(인조 15)].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였던 김준룡(1586~1642)이 근왕병을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중 용인 광교산에서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이때 김준룡은 청의 장수 공경(孔耿)의 부대와 싸워 청 태조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함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이괄의 반란 세력이 도성을 장악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② 곽재우, 고경명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1592, 선조 25).

④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임시 기구로 비변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

⑤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된 훈련도감이 신설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의 일이다.

정답> ③

2월 7일에 '수곡 도회(都會) 주모자 유계춘을 병영에 감금'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월 14일에는 '덕천 장시 등에서 농민 시위 전개'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2월 19일에 '우병사 백낙신이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성난 농민들이 그를 포위하여 감금'한 내용이 나와 있다. '유계춘'과 '백낙식'이라는 이름(덧붙여 사족 이명윤 포함)과 '수곡'과 덕천'이라는 지명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자료 속 '사건'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에 발생한 진주 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상황 수습을 위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1807~1876)가 안핵사로 파견되고, 삼정이정청이 임시로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①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전개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제2차 봉기, 1894.9).

② 정부와 약조를 맺고 집강소를 설치한 것도 동학 농민 운동이다(1894.7.6). 전봉준과 전라도 관살사였던 김학진 사이에 합의되었다. 

④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가 주도하여 봉기한 사건은 홍경래의 난이다(1811, 순조 11).

⑤ (1889년과 1890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 방곡령이 선포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일본으로의 지나친 곡물 수출 때문이었다. 1개월 전 예고를 전제로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릴 수 있음은 조선과 일본이 1883년 7월에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되어 있었다. 

정답> ④

'선혜청 당상 민응수가, 지금 돈이 귀해진 것은 공가(公家)에서 거두어 숨겨 두고 부민(富民)들이 쌓아 두어 유통이 되지 않았서입니다. 만일 관가의 돈을 쌓아 두는 폐단을 없애고 민간의 돈을 유통시키는 효과가 있게 한다면, 전황(錢荒)의 폐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임금이 말하기를, 더 주조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후일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처럼 전황의 폐단이 발생한 것은 17세기 후반 화폐 유통이 본격화되고 난 후의 일이다(1678, 숙종 4). 

관리가 과전법에 의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 직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왜관에서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진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德大)가 등장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모내기법의 확대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확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③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주제로 '(가)의 유적과 역사 인물을 찾아서'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답사 경로로 '고구려비 → 탑평리 칠층 석탑(중앙탑) → 창동리 마애 여래상 → 탄금대'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지역'은 충북 충주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생 직후인 1592년 4월 26일~28일 삼도도순변사 신립(1546~1592)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에 항전하다 전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곳은 충북 청주이다(1377, 고려 우왕 3).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곳은 충남 예산이다(1868, 조선 고종 5). 남연군의 묘가 있었던 정확한 지명은 충남 예산 덕산면 상가리이다.

④ 명 신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가 건립된 곳은 충북 괴산이다(1704, 숙종 30). 정확한 지명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이다. 

⑤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한 곳은 개경(개성)이다(1198, 고려 신종 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