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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50회 (2)

정답> ④

'그림으로 보는 조선 국왕의 일생'이라는 제목 아래 '이 그림은 효명 세자가 (가)에 입학하는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중 「입학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효명 세자는 이날 궁을 나와 (가)에 도착하여 먼저 대성전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린 후, 명륜당에 가서 스승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곧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 성균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효명 세자(1809~1830)는 1812년(손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17년 3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또 1827년에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효명 세자의 비가 이른바 '조대비'로 더 많이 알려진 신정 왕후(1808~1890)이다.

성균관은 생원시나 진사시의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전문 강좌인 7재가 운영된 교육 기관은 고려의 국자감이다(1109, 예종 4).

②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된 교육 기관은 조선의 향교이다.

③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교육 기관 역시 향교이다.

⑤ 한어(漢語), 왜어(倭語), 여진어 등 외국어 교육을 담당한 조선의 교육 기관은 기술 교육 기관 중 하나인 사역원이다.

정답> ①

(가)에는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입니다. 화친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와 신도가 전수하여 사학이 온 나라에 두루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유명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지부복궐척화의소[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임을 알 수 있다(1876.1.24). 당시 최익현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체결이 협의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예전 임진왜란 직전에 지부상소를 올린 중봉 조헌(1544~1592년)의 예를 따라]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 앞에 가 이같이 상소하였다.

(나)에서는 '지금 조정에서는 어찌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러시아가 없는 마음을 먹게 하고, 미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만들어 오랑캐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스스로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일본을 위해 말하고 예수를 좋은 신이라 하며, 난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역시 유명한 1881년(고종 18) 2월의 영남만인소임을 알 수 있다(이만손, 강진규, 이만운 등이 중심).

창산 김기수(1832~?)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4월의 일이다(1차 수신사).

오답 해설>

②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것은 1885년(고종 22) 4월의 일이다(~1887.2).

③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붙태운 것은 1866년(고종 3) 7월의 일이다.

④ 거중 조정 조항이 포함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것은 1882년(고종 19) 5월의 일이다. 여기서 거중 조정이란 국제기구, 국가, 개인 따위의 제3자가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끼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말한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1조에 규정되었으며, 고종은 이후 이 조항에 기대어 미국에게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은 1866년(고종 3) 10월의 일이다.

정답> ④

'김상철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들의 생계는 점포를 벌여 놓고 사고파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어물과 약재 등 온갖 물건의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는 도고(都庫)의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조(大朝)께서 여러 차례 엄하게 다스렸으나, 점차 해이해져 많은 물건의 가격이 폭등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시서(平市署)* 등에서 적발하여 강하게 다스렸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도고의 폐단이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 평시서(平市署) :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청이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경시서(京市署)라 하다가 1466년(세조 12)에 평시서로 개칭되었다.

왜인들에게 3포[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창원)]를 개항한 것은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3포 개항). 그리고 중종 5년인 1510년에 일어난 3포 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었다(이때 비변사가 처음으로 임시로 설치되어 국방 문제 논의).

오답 해설>

① 서얼이 청요직 통청을 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결국 철종 2년인 1851년에 신해허통이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적 규제는 철폐되었다.

② 한글 소설이 널리 유행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동국문헌비고가 간행된 것은 조선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⑤ 장시에서 판소리가 행해졌던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①

'신(臣) 병창이 (가) 앞에 나아가 품의했더니, 이르기를 성묘(聖廟)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된 제현 및 충절과 대의가 매우 빛나 영원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곳의 서원 외에는 모두 향사(享祀)를 중단하고 사액을 철폐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지시를 받들어 이미 사액된 서원 중 앞으로 계속 보존할 곳 47개를 별단에 써서 들인 바 계하(啓下)**하시면 각 도에 알리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전국의 서원을 47곳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한 흥선 대원군(1820~1898)임을 알 수 있다(1864, 고종 원년).

* 동서무(東西):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세운 건물[행각]을 아울러 이르는 말(즉 동쪽에 세운 건물이 동무, 서쪽에 세운 건물이 서무).

** 계하(啓下): 국왕의 재가

흥선 대원군은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한 것은 1871년(고종 8) 4월의 일이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오답 해설>

② 나선 정벌을 위하여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5년인 1654년(변급)과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③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를 해방한 것은 순조 원년인 1801년의 일이다.

④ 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총융청을 설치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⑤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정답> ⑤

'이것은 우정총국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발행한 국내 최초의 우표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화폐 단위가 '문(文)'이어서 문위 우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되면서 이 우표는 더이상 발행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종 21년인 1884년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은 청·일 간 톈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1885.4). 참고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1885.1).

오답 해설>

①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②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은 을미 의병이다[단발령이 시행된 것은 1895년 11월(음력)].

③ 개혁 추진 기구로 교정청이 설치된 것은 1894년(고종 31) 6월의 일이다.

④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추진된 개혁은 광무개혁이다(1897~1904).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 '백동화를 제일 은행권으로 바꾸려고 교환소에 갔더니,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해 바꿔 주더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백동화는 곧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손해를 보더라도 교환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상황은 재정 고문 메가타의 주도로 이루어진 화폐 정리 사업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905.7~1909.12).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가 대한 제국에 재정 고문으로 오게 된 것은 제1차 한일 협약 때문이다(1904.8).

오답 해설>

① 금속류 회수령(시행규칙)이 공포된 1941년 10월의 일이다.

②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부터) 전개된 것은 1907년 2월의 일이다(~1908.7).

③ 산미 증식 계획이 실시된 것은 1920년이다(~1934).

④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된 것은 1920년 8월의 일이다. 서울에서도 1923년 1월에 같은 명칭의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었다.

정답> ⑤

'이 문서는 에디슨이 설립한 전기 회사가 프레이저를 자사의 조선 총대리인으로 위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회사는 총대리인을 통해 경복궁 내의 전등 가설 공사를 수주하였고, 이에 따라 경복궁 내에 발전 설비를 마련하여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등을 가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복궁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것은 1887년(고종 24) 3월 6일의 일이다.

노량진에서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된 것은 1899년(고종 36) 9월의 일이다. 참고로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개통된 것은 이보다 4개월 전인 1899년 5월이다.

오답 해설>

① 알렌(1858~1932)의 건의로 광혜원이 세워진 것은 1885년(고종 22) 2월의 일이다.

② 박문국에서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은 1883년(고종 20) 10월의 일이다.

③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된 것은 1883년(고종 20) 3월의 일이다.

④ 정부가 외국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을 세운 것은 1883년(고종 20) 8월의 일이다.

정답> ②

'이곳은 공주 우금치 전적으로 (가) 당시 남접과 북접 연합군이 북상하던 중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금치는 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제시된 '(가)'는 고종 31년인 1894년에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동학 농민군은 제1차 봉기 때인 1894년 4월(음력)에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였다(황토현 전투). 또한 2주여 일 뒤에는 장성 황룡촌에서 중앙 경군까지 격파한 후(황룡촌 전투)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1894.4.27(음력)].

오답 해설>

① 습재 이소응(1852~1930), 의암 유인석(1842~1915) 등이 주도한 운동은 을미의병이다.

③ 한성 조약이 체결되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은 갑신정변이다(1885.1).

④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가 결의된 것은 1898년 10월의 일이다(독립 협회의 자강 개혁 운동이자 자유 민권 운동).

⑤ 사건 수습을 위하여 환재 박규수(1807~1876)가 안핵사로 파견된 것은 진주 농민 봉기 때이다(1862, 철종 13).

정답> ③

'사건 일지'라는 제목 아래 11월 10일에 '이토가 고종에게 일왕의 친서를 전달'하고 11월 15일에도 '이토가 고종을 접견하고 협상 초안을 제출'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1월 16일에는 '이토가 대한 제국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11월 17일에는 '일본군을 동원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조약 체결을 진행'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1월 18일에는 '이토가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고종의 윤허 없이 조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건은 1905년 11월 17일에 강요된 제2차 한일 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을사늑약 강요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이듬해인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통감 정치).

오답 해설>

① 대한국 국제가 반포된 것은 1899년(고종 36) 8월의 일이다.

② 별기군 교관으로 일본인이 임명된 것은 1881년(고종 18) 5월의 일이다.

④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96년(고종 33) 2월의 일이다(아관 파천).

⑤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해군에게 격침된 것은 1904년 2월의 일이다(러일 전쟁 발발).

정답> ①

'(가)의 우수리스크 거주지'라는 제목 아래 '이 건물은 연해주의 한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독립운동가 (가)이/가 거주하였던 곳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1909년 대동공보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11년에는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간하였다. 1918년 제2회 전로 한족 대표 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20년 일본군이 자행한 4월 참변으로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최재형(1860~1920)임을 알 수 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한 일 중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를 지원한 것도 있다(1909.10)

오답 해설>

② (멕시코의 메리다 지역에) 숭무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인물은 지역회 회장 이근영(?~?)이다(1910.11).

③ 의열단의 활동 지침인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936)이다(1923.1).

④ (미국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한 인물은 박용만(1881~1928)이다(1914.6).

⑤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우사 김규식(1881~1950)이다(1918.8).

정답> ⑤

'(가), 좌우가 힘을 합쳐 창립하다'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사회 단체인 (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장면별 구성으로 '정우회 선언을 작성하는 장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는 장면', '전국 주요 도시에 지회가 설립되는 장면', '순회 강연단을 조직하고 농민 운동을 지원하는 장면'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의 일환으로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임을 알 수 있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동년 12월에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오답 해설>

① 평양에 자기 회사(평양 자기 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한 단체는 1907년 4월에 비밀리에 결사한 신민회이다(1908.10).

② 2·8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발표한 단체는 재일 동경 유학생들로 구성된 조선 청년 독립단이다(1918.12).

③ 제국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8월의 일이다. 개신 유학자 묵암 이종일(1858~1925)에 의해 순국문판으로 발행하였으며, 주로 일반 대중과 부녀자 계층을 구독 대상으로 하였다. 민중 계몽과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④ 어린이날을 제정하고(1923.5) 잡지 어린이를 간행한(1923.3) 단체는 천도교 소년회이다(1921.5).

정답> ②

위의 자료에 '신(臣) 등이 들은 말에 의하면 일전에 외부(外部)에서 산림과 원야(原野)와 진황지(陳荒地)를 50년 기한으로 일본인에게 빌려주는 일을 정부에 청의(請議)하여 도하(都下)의 인심이 매우 술렁거리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종로에서 송수만, 심상진 씨 등이 각 부(府)·부(部)·원(院)·청(廳)과 각 대관가(大官家)에 알리노라. 지금 산림과 하천 및 못, 원야, 황무지를 일본인이 청구하니, 국가의 존망과 인민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노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일본이 1904년 6월에 대한 제국 영토의 1/4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사실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기 위해 성암 송수만(1857~?), 심상진(?~?) 등은 (대한)보안회를 설립하였고, 결국 일본의 요구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1904.7). 참고로 『해학유서』는 한말의 애국 계몽 운동가인 이기(1848~1909)의 시문집이다.

오답 해설>

① 105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11년 9월의 일이다.

③ 독립문이 건립된 것은 1897년(고종 34) 11월의 일이다.

④ 조선 형평사가 (경남 진주에서) 설립된 것은 1923년 4월의 일이다.

⑤ 황국 중앙 총상회가 조직된 것은 1898년(고종 35) 7월의 일이다.

정답> ⑤

'이곳은 부산 해운대에 있는 애국지사 강근호(1888~1960) 길입니다. 그는 1920년 10월 백운평,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가) 당시 북로 군정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대한 국민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10여 회의 전투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①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협력하여 진행한 전투로는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이 있다(1932~1933).

② 미국 전략 정보국(OSS)의 지원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이다(1940.9).

③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1919년의 3·1 운동이다.

④ 조국 광복회의 지원 아래 유격전으로 전개된 것은 동북 항일 연군이다(1936.3). 참고로 이듬해에 터진 '혜산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국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아 붕괴하였다(1937.9~1938.9). 이로써 함경남도 국경 지방의 항일 조직과 만주 항일 무장 투쟁 세력과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 혜산 사건 :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 습격 작전 이후 일본 관헌이 국내 연계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 광복회 회원들을 무더기로 기소한 사건이다.

정답> ①

'이것은 국회 의사당의 중앙홀에 있는 (가)의 흉상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안창호,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국권 피탈 이후에는 서간도 삼원보로 건너가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 설립을 주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았던 석오 이동녕(1869~1940)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②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한)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인물은 돈헌 임병찬(1851~1916)이다(1912.9).

③ 독립 투쟁 과정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20.12).

④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한 인물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다(1944.8).

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은 보재 이상설(1870~1917), 이준(1859~1907), 이위종(1887~?) 3인이다.

정답> ③

'이 사진은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는 강주룡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대공황 이후 열악해진 식민지 노동 환경에서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며 평원 고무 공장 쟁의를 주도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사건은 자본가와 일제에 맞선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평양의 을밀대 지붕 위에서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며 '체공녀(滯空女)' 강주룡(1901~1931)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 농성을 벌인 것은 1931년 5월 28일의 일이다.

전시 징용 정책(과 임금 체불 및 차별 대우)에 반대하여 동방 광산 광부들이 투쟁한 것은 1942년 5월의 일이다(한 달 동안 휴업). 400여 명의 광부들은 악질 감독이 노동자들을 구타한 것을 계기로 취업을 거부하는 한편 광산 사무실과 선광장(選鑛場)을 비롯한 시설물들을 파괴하였다.

오답 해설>

①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이 창립된 것은 1927년 9월의 일이다. 사실 기존의 조선 노 총동맹(1924.4)에서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된 것이다.

② 전국 단위의 조직인 조선 노동 공제회가 조직된 것은 1920년 4월의 일이다.

④ 회사 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회사령(허가제 회사령)이 제정된 것은 1910년 12월의 일이다. 참고로 1920년 4월에 이르러 신고제(계출제) 회사령으로 전환되었다.

⑤ 일본인 감독의 한국인 구타 사건을 계기로 원산 총파업이 일어난 것은 1929년 1월의 일이다(~4월까지 지속).

정답> ③

'○○시 근현대 역사 투어'라는 제목 아래 투어 일정이 제시되어 있다. 출발 후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 흉상'을 거쳐 '일본군 위안부 묘역, 망향의 동산'이 나와 있다. 이어 '국난 극복의 역사, 독립 기념관'과 '초혼묘와 사우(祠宇)*, 유관순 열사 사적지'가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시'는 충남 천안(시)임을 알 수 있다.

* 사우(祠宇):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이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1902~1920)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같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지금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있는 장터이다.

오답 해설>

① 4·3 사건으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지역은 제주도이다(1948).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지역은 충남 예산(충남 예산 덕산면 상가리)이다(1868.5).

④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 소속의) 강우규 의사(1855~1920)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한 곳은 서울(역)이다(1919.9).

⑤ 지주 문재철의 횡포에 맞서 소작 쟁의가 발생한 지역은 전남 신안의 암태도이다(1923.8~1924.8).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브나로드 운동을 소재로 소설 상록수를 쓴 사진 속 인물에 대해 말씀해' 달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진 속 인물은 심훈(1901~1936)이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장편소설로,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현상에 당선된 작품이기도 하다.

심훈은 1930년 3·1절을 맞아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당시의 감격을 되살려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지었다. 시집(표제작 '그날이 오면')을 1932년에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좌절되었고, 심훈 사후인 1949년에 가서야 유고집으로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② 근대극 형식을 도입한 토월회가 (일본 도쿄에서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은 1923년 5월의 일이다(신극 운동 단체). 박승희(1901~1964), 김기진(1903~1985) 등이 주도하였다.

③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인물은 나운규(1902~1937)이다(1926.10).

④ 고대사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936)이다(1931년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

⑤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을 묘사한 소설 고향을 연재한 인물은 이기영(1895~1984)이다. 조선일보에 1933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34년 9월까지 연재되었다. '고향'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하게 반영된 신경향파 소설이다.

정답> ②

'조선말 큰사전 편찬 원고'라는 제목 아래 '(가)에서 조선말 사전 편찬을 위해 1929년부터 13년 동안 작성한 원고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원고는 1942년 일제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단체'는 조선어 학회임을 알 수 있다(1931.11).

조선어 학회는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다. 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고 1935년부터 표준어를 사정하여 이듬해인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하였다.

오답 해설>

① 국어 문법서인 대한문전을 편찬한 이는 구당 유길준(1856~1914)이다(1908).

③ 우리말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를 저술한 이는 서파 유희(1773~1837)이다(1824, 순조 24).

④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학부 아래에 설립된 것은 국문 연구소이다(1907.7).

⑤ 주시경(1876~1914)을 중심으로 국문을 정리하고 철자법을 연구한 단체가 바로 국문 연구소이다.

정답> ⑤

(가)에는 '연통제 공소 공판, 히라야마 검사의 구형, 피고 37명에 대하여 징역형'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통제라는 말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가 조직된 1919년 7월 10일 이후의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1921년 후반까지 연통제 유지, 제시된 신문 보도는 매일신보의 1920년 11월 19일자 기사).

(나)에는 '금년 1월 8일에 돌발한 앵전문 앞 대역 사건, 범인은 경성 출신 이봉창'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 의사(1901~1932)이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 대표 회의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것은 1923년 1월의 일이다(~6월).

오답 해설>

① 신규식 등이 (중국 상하이에서) 대동 단결 선언을 발표한 것은 1917년 7월의 일이다.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성명서를 공표한 것은 1941년 12월 10일의 일이다.

③ 김구, 이시영 등이 (중국) 항저우에서 한국 국민당을 창당한 것은 1935년 11월의 일이다.

④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의 일이다.

정답> ④

'이 문서는 (가)이/가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 강령 초안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건국 강령은 민족 운동의 방향과 광복 후 국가 건설의 지향을 담은 것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헌장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 초안에는 (가)이/가 고심하여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삼균주의를 제창한 조소앙(1887~1958)임을 알 수 있다.

조소앙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강조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참고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임시 정부 공보를 통해) 발표된 것은 1941년 11월 28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대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창립한 인물은 도산 안창호(1878~1838)이다(각 1908.9/1913.5).

②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한 인물은 박상진(1884~1921)이다(1915.7).

③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1932.10).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중국 난징 교외에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⑤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한 인물은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1897~1979)이다(1933).

정답> ②

(가)의 제31조로 '입법권은 국회가 행한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53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하여 각각 선거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제55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제1차 개헌 헌법, 이른바 '발췌 개헌(안)'임을 알 수 있다(1952.7).

(나)의 제7조의2로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에 국민투표에 부하여 민의원 의원 선거권자 3분지 2 이상의 투표와 유효 투표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55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부칙으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나)'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 제2차 개헌,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임을 알 수 있다(1954.11).

발췌 개헌은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을 거치는 가운데 국회에서 기립 표결로 통과되었다(1952.5.25~1952.7.7). 1952년 5월 25일 공비 소탕이라는 구실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을 포함한 경남, 전라남북도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답 해설>

① 제헌 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제헌 헌법이다(1948년 7월 17일 공포, 제헌절).

③ 대통령의 국회의원 1/3 추천 조항을 담고 있는 헌법은 제7차 개헌, 이른바 '유신 헌법(안)'이다(1972.12).

④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제를 규정한 헌법은 제8차 개헌이다(1980.10).

⑤ 호헌 동지회(護憲同志會)가 결성된 것은 사사오입 개헌이 억지로 통과된 직후에 설립된 범야당 연합 모임에서이다(1954.11.29). 이승만 정부가 강행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통합 야당의 창당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짐).

정답> ④

<자료 해설 46번 참고>

판문점에서 6·25 전쟁 정전 협정이 조인된 것은 1953년 7월 27일의 일이다(1952년 7월의 발췌 개헌과 1954년 11월의 사사오입 개헌 사이의 시기에 해당).

오답 해설>

① 중화 인민 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2년 8월의 일이다(한·중 수교). 그보다 먼저 한·중 무역대표부가 1990년 10월에 교환 설치되었다. 참고로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1990년 9월이다.

②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 12월의 일이다.

③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파병이 시작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4년 9월의 일이다(~1973.3).

⑤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원조 협정이 체결된 것은 1950년 1월의 일이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경제 및 군사 원조에 관한 협정(조약 제4호)이다. 참고로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은 1953년 10월 1일의 일이다. 명칭이 비슷하여 헷갈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정답> ④

'대통령, 공명 선거와 사회 정책 방향 제시'라는 제목 아래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월드컵과 부산 아시안 게임 개최로 국운 융성의 한 해를 만들자고 강조하며, 공명한 대통령 선거와 지방 자치 선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울러 정부도 경제적 정의 실현과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여 중산층과 서민 생활 안정에 노력하겠다고 발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정부'는 김대중 정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98.2~2003.2).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이 실시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10월의 일이다(제정은 1999년 9월).

오답 해설>

①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8년 1월의 일이다.

대학 졸업 정원제가 시행된 것은 19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른바 '국보위')에 의해 단행된 '7·30 교육 조치' 때문이다. 이때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되고 대신 학력고사 성적 50% 이상, 고교 내신 성적 20% 이상을 반영해 학생들을 뽑도록 하였다. 또 이 조치로 말미암아 대학 정원이 대폭 늘어나고 과외도 전면 금지되었다. 사실 이때는 최규하 정부 시기(1979.12.21~1980.8.10)이지만 실권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③ 노인 장기 요양 보험법이 제정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4월의 일이다. 이듬해인 2008년 7월부터 시행되어 보험료 고지 및 급여의 개시가 이루어졌다(이때는 이명박 정부 시기).

⑤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가 시작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9년의 일이다.

정답> ③

'이것은 대전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장면 부통령 후보 유세를 기회로 삼아 시작한 3·8 민주 의거를 기리는 탑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3·8 민주 의거는 대구의 2·28 민주 운동, 마산의 3·15 의거와 더불어 (가)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대학 교수단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행진을 벌인 것은 1960년 4월 25일의 일이다('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시국 선언문 발표).

오답 해설>

①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1964년 6월의 '6 3 시위'이다.

②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운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④ 3·1 민주 구국 선언을 통해 긴급 조치 철폐 등을 요구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76년 3월의 일이다(유신 반대 운동).

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제9차 개헌(1987.10)].

정답> ④

'광주 대단지 주민 5만여 명, 대규모 시위'라는 제목 아래 ' 지난 10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주 대단지에서 5만여 명의 주민들이 차량을 탈취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 시위는 서울 도심을 정비하기 위하여 10만여 명의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서울시가 처음 내건 이주 조건과 달리, 상하수도나 교통 등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시위 과정에서 관공서와 주유소 등이 불에 탔고, 주민과 경찰 다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 주민들이 구속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기사의 사건은 1971년 8월 10일에 발생한 경기도 광주 대단지(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주민 수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하며 도시를 점거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 결과)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2년 11월의 일이다(~1973.8).

오답 해설>

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9월의 일이다.

② 10·4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10월의 일이다.

③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서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의 일이다.

⑤ 남북한의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공업 지구 건설에 착수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6월의 일이다(개성 공단 착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