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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50회 (1)

정답> ②

'공주 석장리에서 남한 최초로 (가) 시대의 유물인 찍개, 주먹도끼 등의 뗀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번 발굴로 우리나라에서도 (가)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구석기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을 통해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석회암) 동굴이나 막집에서 거주하였다.

오답 해설>

① 반달 돌칼로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③ 거푸집을 이용하여 청동 무기를 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거푸집은 금속을 녹여 부어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이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금속 도구의 제작을 위해 사용되었다.

④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하여 식량을 저장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⑤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을 만든 것 역시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좌장군이 두 군대를 합하여 맹렬히 (가)을/를 공격하였다. 상 노인,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서로 [항복을] 모의하였다. ······· [우거]왕이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한음, 왕협,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고조선, 정확하게는 위만조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위만 왕조'나 '위만 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ㄱ.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 대(재위 501-523)의 일이다.

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한 것은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 대(재위 179-197)의 일이다(194, 고국천왕 16).

ㄷ.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위만 집권 시기이다(기원전 2세기 전반). 이때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ㄹ. 살인, 절도 등의 죄를 다스리는 범금 8조가 있었던 나라는 고조선(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고조선)에 대한 설명으로 <보기>에서 옳은 것은, 'ㄷ과 ㄹ'이다.

정답> ③

'(가)의 사회와 경제'라는 제목 아래 풍습으로 '산천을 중시하며, 산과 내마다 읍락의 경계가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읍락을 침범하면 소, 말 등으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責禍)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특산물로 '낙랑의 단궁이 그 땅에서 나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산출된다. 무늬 있는 표범과 과하마 등이 유명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임을 알 수 있다.

동예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지배자[군장]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①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삼한이다.

② 정사암에 모여 재상을 선출한 나라는 백제이다(정사암 회의).

④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연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⑤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로 배상하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책 12법).

정답> ⑤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 ······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금·옥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로 나오자,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 행사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 비가 오고 비올 때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유명한 '만파식적 설화'로, 자료 속 '용(龍)'은 신라의 제30대 왕인 문무왕(재위 661-681)이고, '왕'은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을 가리킨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마음[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는 호국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인 원년에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였다(681, 김흠돌의 난).

오답 해설>

① 병부와 상대등을 설치한 신라의 왕은 제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이다(각 517/531).

②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신라의 왕은 제22대 왕인 지증왕(재위 500-514)이다(512, 지증왕 13).

③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신라의 왕은 제17대 내물(재위 356-402)이다.

④ 매소성 전투에서 당의 군대를 격파한 신라의 왕은 문무왕이다(675, 문무왕 15).

정답> ②

(가)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서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고구려 왕 거련은 곧 고구려의 제20대 왕인 장수왕(재위 413-491)이고, 피살된 왕은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으로, 제시된 자료 속 사건은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백제의 도읍인 한성(위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이로써 백제의 한성 시대는 끝나고 웅진(공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에는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 60일 동안 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토산을 쌓았다. 토산의 정상은 성에서 몇 길 떨어져 있고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중에 토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록 이길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으로 벌어진 안시성 전투임을 알 수 있다(645, 고구려 보장왕 4).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수대를 물리친 것은 영양왕 23년인 612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한 것은 재위 12년인 311년의 일이다.

③ 고국원왕이 백제(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전사한 것은 371년의 일이다.

④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한 것은 동천왕 18년인 244년의 일이다. 이때 고구려의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⑤ 광개토 대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재위 10년인 400년의 일이다.

정답> ⑤

'문화재청이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3점에 대한 보물 지정을 예고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유물은 김수로왕이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가)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또한 출토지가 명확하고 보존 상태가 온전하여 학술 및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금관)가야임을 알 수 있다.

가야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오답 해설>

①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나라는 신라이다.

② 만장일치제로 운영된 화백 회의가 있었던 나라 역시 신라이다.

③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④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한 나라는 신라이다.

정답> ⑤

'이것은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 사리감이다. 이 사리감에 새겨진 글을 통해 능산리 절터가 관산성에서 전사한 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재위 523-554)임을 알 수 있다.

성왕은 재위 29년인 551년에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다.

성왕 6 538사비천도남부여일본(노리사치계,불교)
55방지방제도정비22부중앙관제 성사남노5522
진흥왕배신으로나제동맹결렬, 관산성에서 전사
 

오답 해설>

①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한 왕은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재위 600-641)이다(630년대 추정).

②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왕은 백제의 제15대 왕인 침류왕(재위 384-385)이다(384, 침류왕 원년).

③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하게 한 왕은 백제의 제31대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이다(642, 의자왕 2).

④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한 왕은 백제의 제13대 왕인 근초고왕(재위 346-375)이다(375, 근초고왕 30).

정답> ②

'(가), 남북국 시대를 열다'는 제목 아래, '<1부> 동모산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다', '<2부> 당의 등주를 공격하고 요서에서 격돌하다', '<3부> 일본에 국서를 보내어 고려 국왕이라 칭하다'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3성 6부로(문왕 때), 정당성의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오답 해설>

①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춘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7, 신문왕 7).

③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한 것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의 일이다.

④ 위화부 등 13부를 두어 행정 업무를 분담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

⑤ 마진이라는 국호와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후고구려이다(904).

 

* 발해에 관한 기록 : 제발해 조아동동

구당서(발해말갈전),신당서(발해전)
이승휴 제왕운기 최초 발해사 연구, 서사시로 구성
유득공 발해고 신라발해南北國주장,발해사만다룬최초사서
한치윤 해동역사 발해를 고,,,고려와같은 비중으로다룸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해, 신라 양국시대론
정약용 아방강역고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다룸
안정복 동사강목 삼국사기를 읽고 北國이 발해임을 밝혀냄
이종휘 동사 단군-기자-삼한-후조선본기와 따로 <세가>편을 서술하여면서 발해세가를 기자-부여-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킴

3. 36(당관제모방,독자성 )

정당성(대내상)-6(()충인의()지예신),선조성,중대성

4. 주자감(국립대)

5.중정대(감찰기관)-통신(사정부),고려(어사대),(사헌부)

6.지방제도-51562

7.발해가 우리민족이 세운나라라는 증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당과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국가로 인식

발해기록역사서

말갈족은 우리민족의 한 분파

당적요소 고구려적요소
36/주작대로/1562/10
관등제/동경성축조/잠자는미녀상/공주묘(벽돌무덤)
5경제/궁전지의온돌장치/천장의모줄임구조/사원지의불상양식/와당의연화문/석등/발해성터/발해음악/공주묘(굴식돌방)
 

정답> ②

'(가)은/는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 [왕의] 총애를 받던 측근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여러 도적들이 봉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가)이/가 몰래 [왕위를] 넘겨다보는 마음을 갖고 ······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하게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그 백성들이 환영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는 점, '무진주(지금의 광주)'와 '완산주(지금의 전주)'라는 부분에서 제시된 '(가) 인물'은 900년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임을 짐작할 수 있다.

ㄱ. 후백제는 건국 후 남중국의 후당,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옳은 설명이다.

ㄴ. 광평성을 비롯한 각종 정치 기구를 마련한 인물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이다(904). 틀린 설명이다.

ㄷ.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신라의 제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을 죽게 한 인물은 견훤이다(927). 옳은 설명이다.

ㄹ.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인물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다(936, 태조 19). 틀린 설명이다.

따라서 <보기>에서 견훤에 대한 옳은 설명은, 'ㄱ과 ㄷ'이다.

정답> ⑤

'내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백성에게 있노라. 지방 수령들의 눈과 귀를 빌어 백성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우서(虞書)의 12목 제도를 본받아 시행할 터이니, 주나라가 8백 년간 지속되었듯이 우리의 국운도 길이 이어질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우서의 12목 제도를 본받아 시행'한다는 부분에서 제시된 '왕'은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절도사)를 파견한 고려의 제6대 왕, 성종(재위 981-997)임을 알 수 있다(983, 성종 2).

고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982, 성종 원년).



 
 
 
 
문신월과법

 
 
 
 
평창
 
 
 
사제도
 
 
서원
 
 
 
원중보
 
 


 
 
 
직개편
 
 
교주의
 
 
앙관제
 
 
권농정책
 
노비환천법 방관파견
12
자감
 
 
 

 

 

오답 해설>

① 천수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왕은 고려 태조(재위 918-943)이다(918, 고려 태조 원년).

② 관학을 진흥하고자 양현고를 설치한 왕은 고려의 제16대 왕인 예종(재위 1105-1122)이다(1119, 고려 예종 14).

③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한 왕은 신라의 제38대 왕인 원성왕(재위 785-798)이다(788, 신라 원성왕 4).

④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을 수복한 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1374)이다(1356, 고려 공민왕

정답> ③

'이곳은 김방경(1212~1300)의 묘입니다. 그는 개경 환도 이후 몽골의 간섭이 본격화된 이 시기에 여·몽 연합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시기'는 원 간섭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 간섭기는 일반적으로 1270년(원종 11)부터 1256년(공민왕 5)까지로 본다(다른 주장 있음).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두 차례 이루어졌는데 모두 실패하였다[1차 원정은 1274(원종 11), 2차 원정은 1281(충렬왕 7)].

원 간섭기에 고려의 관제가 격하되었는데,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첨의부로 개편되었다(2성 6부 → 1부 4사).

오답 해설>

①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창설된 것은 조선 선조 26년인 1593년의 일이다.

② 삼군부가 부활하여 군국 기무를 전담한 것은 조선 고종 2년인 1865년의 일이다.

④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시행된 것은 조선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비변사가 (임시로 처음) 설치된 것은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 발생 → 3포 폐쇄). 을묘왜변이 발생한 명종 10년인 1555년에 상설 기구화되었다.

정답> ①

'(가) 범어사본, 국보로 승격'이라는 제목 아래 '부산 범어사가 소장한 (가) 권4~5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범어사 소장본은 일연이 저술한 (가)의 현존 판각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미 국보로 지정된 판각본의 누락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문화재정 관계자는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역사서'는 일연(1206~1289)이 1285년경(고려 충렬왕 11)* 편찬한 삼국유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삼국유사 편찬 연도를 지금까지는 1281년(고려 충렬왕 7)로 표시하였으나, 불교 전문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제부터는 1285년경(고려 충렬왕 11)으로 표시함.

삼국유사에는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오답 해설>

②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된 역사서는 '실록'이다.

③ 왕명에 의해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역사서는 각훈(?~?)의 해동고승전이다(1215, 고종 2).

④ 삼국유사는 본기, 열전 등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설화를 중심으로 한 기사본말체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⑤ (장편) 서사시[5언시] 형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반영된 역사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1193, 고려 명종 23). 무신 집권기라는 사회 혼란 속에서 고려의 역사 전통을 고취할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얼마 전 왕께서 친히 위봉루에 나가 과거 급제자를 발표하셨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한림학사 쌍기가 이번에 처음 치러진 과거의 지공거를 맡았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임을 알 수 있다.

광종은 재위 7년인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였다.



 
 
 
비안검법 교장려
 
거제도
 
위보
 
 
신숙청
 
과외교
 
법사
 
 
복제정
 


 
 
 

오답 해설>

① 녹과전이 시행된 것은 고려 원종 12년인 1271년의 일이다. 녹과전은 경기 8현에 한정하여 수조권을 지급한 토지이다.

②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이 설치된 것은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의 일이다. 상왕인 충선왕이 원의 연경에 세웠다.

③ 주전도감이 설치된 것은 고려 숙종 2년인 1097년의 일이다.

⑤ 금속 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이 인출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충북 청주 교외의 흥덕사).

정답> ②

'불상으로 보는 불교 문화 사진전'이라는 제목 아래 '이 실에서는 ○○ 시대 불상의 사진을 전시합니다. ○○ 시대에는 대형 철불이 유행하였으며,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처럼 거대한 불상이 조성되기도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선지 ②는 유명한 경주 석굴암 본존불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 불국사가 창건될 시기에 같이 조성되었다.

오답 해설>

① 광주 춘궁리 철불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이전까지 석불, 금동불이 주류를 이루다가 고려 초인 10세기 말부터 철불이 유행하였다.

③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으로, 역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佛頭)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佛身)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④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다. 신라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흙으로 만들어졌다.

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 좌상이다.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하였다. 역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977, 고려 경종 2).

정답> ④

한국사테이터베이스 사이트라는 제목 아래 '고려사절요'를 검색하는 창이 제시되어 있다. 명종 26년(1196) 4월에 '이의민을 제거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명종 26년 5월에 '봉사 10조를 지어 바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종 3년(1200) 12월에는 '도방을 설치하다'는 내용이, 희종 2년(1206) 3월에는 '진강후로 책봉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최씨 무신 정권기를 연 최충헌(1149~1219)임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은 고려 희종 5년인 1209년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인사, 재정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최충헌은 집권 시 2명의 왕(명종과 신종)을 폐하고, 4명의 왕(신종과 희종, 강종과 고종)을 세우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로 한 인물은 묘청(?~1135)이다(1135, 고려 인종 13). 연호를 천개,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하였다.

② 화약과 화포 제작을 위한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한 인물은 최무선(1325~1395)이다(1377, 고려 우왕 3).

③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이동하여 대몽 항쟁을 펼친 인물은 배중손(?~1271)이다(1170, 고려 원종 11).

⑤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권문세족을 견제한 인물은 신돈(?~1371)이다(1366, 고려 공민왕 15).

정답> ①

(가)에 '양규가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석령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혔던 남녀 1,000여 명을 되찾아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무신 양규(?~1011)가 활약한 것은 거란의 제2차 침입 때의 일이다(1010, 고려 현종 원년). 이때 별장 김숙흥(?~1011)과 함께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전 7승하고 백성 1만여 명을 구하였다.

(나)에는 '윤관 등이 여러 군사들에게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쌓게 하고, 변경 남쪽의 백성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윤관(?~1111)이 동북 9성을 쌓은 것은 1107년(고려 예종 2)의 일이다.

(다)에는 '적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고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적군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북면 병마사) 박서가 귀주성을 지킨 것은 몽골의 제1차 침입 때의 일이다(1231, 고려 고종 18)(귀주성 전투).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답> ④

위의 자료에는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구분하여 문무백관에서 부병(府兵),.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科)에 해당하는 토지[즉 '전지']를 주고, 또 과에 따라 땔나무를 구할 땅[즉, '시지']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곧 고려 시대 때의 전시과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도평의사사에서 방을 붙여 알리기를, 지금부터 은병 1개를 쌀로 환산하여 개경에서는 15~16석, 지방에서는 18~19석의 비율로 하되, 경시서에서 그 해의 풍흉을 살펴 그 값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충렬왕 때 개칭된 '도평의사사'라는 기구명을 통해 고려 후기(원 간섭기)의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1279, 충렬왕 5). 은병[활구]이 처음 발행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덕대가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면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둔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전분6등법, 1444(조선 세종 26)].

정답> ②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로 '조선 왕의 자취를 찾아 길을 걷다'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1일차로 '(가) 경복궁 → (나) 종묘'가 2일차로 '(다) 남한산성 → (라) 수원 화성'이, 3일차로 '(마) 영릉 → 신륵사'가 나와 있다.

국왕이 신농,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를 행한 곳은 선농단(先農壇)으로(조선 태조),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오답 해설>

①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태조 3년인 1394년 10월의 일이다(경복궁).

③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하여 청과 항전을 벌인 곳은 남한산성이다(1636, 인조 14).

④ 장용영 외영이 창설된 곳은 수원 화성이다(1793, 정조 17). 장용영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장용영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여주 영릉은 세종대왕릉이다. 여주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願刹)*이기도 하였다.

* 원찰(願刹) : 망자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 원당(願堂) 또는 비보(裨補)라 부르기도 한다.

정답> ③

작품명 '의순관영조도'가 제시되어 있고, '이 나라 사신이 만력제(신종)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있던 의순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조선의 관리들이 예를 갖추어 의순관 앞에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만력제(신종)은 중국 명(明)의 제13대 황제(재위 1572-1620)로,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나라'는 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의주는 중국에 대한 외교 활동의 요지였으며, 때문에 많은 그림과 시문이 산출되었다. '의순관영조도'는 1572년 10월, 명의 사신을 조선의 관리들이 맞아들이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선은 건국 초인 태조 때 삼봉 정도전(1342~1398)을 중심으로 (명에 대한)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것은 고려 정종 때이다(947, 정종 2).

②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왜의) 무역을 허용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이다(1407, 태종 7).

④ (왜와)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한 것은 조선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

⑤ 포로 송환을 위하여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파견한 것은 조선 선조 37년인 1604년의 일이다.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참고로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1607년(선조 40) 정사(正使) 여우길 일행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파견된 적이 있다(이후에도 통신사로 명칭이 바뀌기 전에 두 차례 더 파견).

정답> ⑤

'이곳은 (가)이/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머물럿던 장소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세한도를 그렸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추사 김정희(1786~1856)임을 알 수 있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1804~1865)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그렸다고 전해진다(1844, 헌종 10).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장무상망(長毋相忘)]는 인장을 통해 그림을 그린 추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1852, 철종 3).

오답 해설>

①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한 인물은 정상기(1678~1752)이다(1740년대).

②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의산문답을 집필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③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홍이포 등을 들여온 인물은 호정 정두원(1581~?)이다(1631, 인조 9). 명에 진주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져왔다.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 직방외기, 서양국풍속기 등의 서적도 같이 가져왔다.

④ 침구술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을 저술한 인물은 허임(1570~1647)이다(1644, 인조 22).

정답> ④

'이 그림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가)을/를 환영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벽루연회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은/는 감사 또는 방백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대개 종2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 시대에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최고의 지방 장관인 '관찰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관찰사는 관내 군현의 수령을 감독하고 근무 성정을 평가하였다.

오답 해설>

① 간관으로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이들은 사간원 소속 관리들이다.

② 6조 직계제의 실시로 권한이 약화된 이들은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포함한 의정부 소속 관리들이다.

③ 호장, 기관, 장교, 통인 등으로 분류된 이들은 향리들이다.

⑤ 출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고 유향소 품관을 감독한 이들은 중앙의 고위 관리들이다.

정답> ①

(가)에 '한영규가 아뢰기를, 서양의 간특한 설이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니 어찌 진산의 권상연, 윤지충 같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웠으며, 조문을 거절하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가 매우 큽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최초의 천주교 탄압 사건인 '진산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791, 정조 15). 전라도 진산(珍山)의 두 선비 권상연(1750~1791), 윤지충(1759~1791)이 제시된 대로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워 발생한 사건으로, '신해박해'라고도 부른다.

(나)에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가 무거우니 이를 어찌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사학(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나라에 흉악한 화를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조선 순조 원년인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승훈(1756~1801)은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세례 교인, 세례명 베드로)이다.

(다)에는 '의금부에서, 죄인 남종삼은 명백한 근거도 없이, 러시아에 변란이 있을 것이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을 계책이 있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고자 몰래 외적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을 죽여도 모자랍니다. 죄인이 자백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사료로, 천주교 순교자 남종삼(1817~1866)(세례명 요한)과 관련된 천주교 박해 사건은 병인박해이다(1866, 고종 3).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 천주교박해-신신기병 진황오척프

3
사옥
해박해 정조1791 산사건윤지충(최초순교자)
유박해 순조1801 벽파가시파남인계탄압 사영백서사건
해박해 헌종1839 가작통법, 사윤음
인박해 고종1866 랑스9Kill,최대박해,병인양요원인
 

정답> ④

'호패법 재실시 발표'라는 제목 아래 '금일, 왕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문란해진 군적을 정비하고 이괄의 난 이후 심상치 않은 백성들의 동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호패법은 반정(反正) 직후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새로 군역에 편입될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금까지 시행이 미루어져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임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태종 13년인 1413년에 처음 시행되었으며, 백성들의 호응이 좋지 않아 숙종 초까지 5차례나 중단되었다. 인조 때 호패법 재실시 교지가 내려진 것은 1626년의 일이다(인조 4).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이 제정된 것은 조선 인조 13년인 1635년의 일이다.

 

* 인조-인조반정(서인)친명배금정책이괄의난(정묘호란, 병자호란)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

 

오답 해설>

① 공신에게 공로와 인품에 따라 역분전이 지급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의 일이다.

②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것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의 일이다.

③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는 신해통공이 단행된 것은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의 일이다.

⑤ 1년에 2필씩 걷던 군포를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조선 영조 26년인 1750년의 일이다.

정답> ③

'한국사 과제 안내문'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에 제시된 조선의 농업 서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구황촬요, 금양잡록,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가 제시되어 있다. 참고로 구황촬요는 흉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책으로, 일종의 구황서(救荒書)이다(1554, 명종 9).

정초, 변효문 등이 (왕명을 받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종합하여 편찬한 농업 서적은 농사직설이다(1429, 세종 11). 관찬(官撰)으로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① 목화 재배와 양잠 등 중국 화북 지방의 농업을 소개한 농업 서적은 농상집요이다. 이 책은 고려 때 이암(1297~1364)이 원으로부터 수입한 책이다(1372, 고려 공민왕 21).

② 인삼, 고추 등의 상품 작물 재배법과 원예 기술을 수록한 농업 서적은 산림경제이다(1715년경, 숙종 41). 유암 홍만선(1643~1715)의 저술로 간행되지는 못하였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영향을 주었다.

④ 농촌 생활을 위한 백과사전으로 풍석 서유구(1764~1845)가 저술한 농업 서적은 임원경제지이다(1827, 순조 27).

⑤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이 손수 농사를 지은 경험과 견문을 종합하여 서술한 농업 서적은 금양잡록이다(1492, 성종 23). 금양이라는 모범 농장을 예로 들어 농부의 경험담을 기록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강희맹이 공직에서 은퇴한 후 경기도 금양현(지금의 경기도 시흥시·광명시와 서울특별시 금천구 지역)에 묘막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그곳 농부들과의 대화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지었다(1475~1483년 사이 저술)

정답> ⑤

맨왼쪽 말풍선에 '색경을 편찬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당시 학계에서 배척당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색경을 편찬하고(1676, 숙종 2),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인물은 바로 서계 박세당(1629~1703)이다.

박세당은 소론으로, 유학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참고로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또다른 인물로 남인인 백호 윤휴(1617~1680)가 있다.

오답 해설>

① 청으로부터 시헌력 도입을 건의한 인물은 잠곡 김육(1580~1658)이다(1653, 효종 4).

②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1789, 정조 13).

③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조의제문을 작성한 인물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다(1457, 세조 3).

④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를 제작한 인물은 장영실(1390년경?~?)이다(1433, 세종 15). 이듬해인 1434년에는 자격루[물시계]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