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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51회 (2)

 

정답>

왼쪽 말풍선에 '며칠 전 전하께서 형조와 한성부에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나도 들었네. 다만 육의전은 이번 조치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말은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에 단행된 신해통공임을 알 수 있다.

고액 화폐인 활구가 주조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은병'이라고도 한다.

오답 해설>

담배, 면화 등 상품 작물이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貢人)이 활동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德大)가 등장한 것도 조선 후기이다.

 

정답>

왼쪽 말풍선에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가 그린 미인도인가요?'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맞아요. ()/는 이 그림 외에도 양반들의 풍류와 남녀 사이의 애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혜원 신윤복(1758~?)임을 알 수 있다.

제시된 선지 중에서 신윤복의 작품은 (작품명: 월하정인)뿐이다.

오답 해설>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작품이다(씨름도).

인재 강희안(1417~1464)의 고사관수도이다(조선 전기).

김득신(1754~1822)의 파적도(야묘도추)이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영통동구도이다.

 

정답>

경상도 안핵사 박규수가 아뢴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금번 진주의 백성들이 변란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 수탈하였기 때문이며 변란을 격발시킨 죄를 물어 그를 엄중히 처결하도록 하소서'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변란'은 철종 13년인 1862년에 일어난 진주 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단성, 진주에서의 농민 봉기는 이후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임술 농민 봉기).

진주 농민 봉기 발생의 주된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었기 때문에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홍경래(1772~1812)가 주도하여 봉기한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다(1811.12).

청군이 파병되는 결과를 가져온 '변란'은 임오군란이다(1882.6).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파병된 것이 아니라 주둔해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186312월에서 187311월까지이다.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내건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1894).

 

 

정답>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와 일시, 경로가 제시되어 있다. 주제는 '섬에서 만나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과 저항'으로 나와 있고, 경로는 '외규장각 연무당 옛터 광성보 정족산성 초지진'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주제 및 경로는 모두 강화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국군이 불법으로 점령한 곳은 초지진이 아니라 거문도이다(1885.4~1887.2). 초지진을 공격했던 군대는 신미양요 떄의 미군이다(1871.5).

오답 해설>

프랑스군은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를 약탈하였다(1866.10). 옳은 연결이다.

강화도 연무당은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된 곳이다(1876.2). 옳은 연결이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 부대가 결사 항전한 곳이다(1871.5). 옳은 연결이다.

정족산성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적군(프랑스군)을 물리친 곳이다. 옳은 연결이다.

 

정답>

()의 제5관에 '미국 상인과 상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할 때 입출항하는 화물은 모두 세금을 바쳐야 하며, 세금을 거두는 권한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행사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관세 자주권을 명시한 조항으로 18825월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임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 때는 빠졌던 관세 자주권을 이로써 회복하였다.

()의 제37관에는 '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의 일로 국내에 양식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 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지하고, 미리 그 기간을 항구에 있는 일본 상인들에게 전달하여 일률적으로 준수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방곡령을 명시한 조항으로 18837월 일본과 체결한 조일 통상 장정임을 알 수 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3관은 최혜국 대우와 관련된 내용이다.

. 조일 통상 장정 제37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방곡령 시행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오답 해설>

.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체결된 조약으로는 조선과 일본과 맺은 한성 조약을 들 수 있다(1885.1). 또 청과 일본은 별도로 톈진 조약을 맺었다(1885.4).

. 재정 고문을 두도록 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조약은 19048월에 대한 제국과 일본이 맺은 제1차 한일 협약이다(외교 고문도 포함, 고문 정치 시작).

정답>

'(), 서양의 근대 문물을 직접 목격하다'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와 장면별 구성이 제시되어 있다. 기획 의도로는 '미국 공사의 부임에 대한 답례로 파견된 ()의 발자취를 통해 근대 문물을 시찰한 과정을 살펴본다'가 나와 있고, 장면별 구성으로는 '#1.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하다, #2.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를 접견하다, #3. 보스턴 만국 박람회를 참관하다, #4. 병원, 전신 회사, 우체국 등을 시찰하다'가 나와 있다.

보빙사는 전권대신 민영익(1860~1914)과 부대신 홍영식(1855~1884), 종사관 서광범(1859~1897) 등으로 구성되었다(1883.7.16~1884.5.31).

오답 해설>

수신사라는 이름으로 보내진 사절단으로는 김기수(1832~?)[1]와 김홍집(1842~1896)[2]이 있다.

조선책략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한 이는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다(1880.9).

(청의 근대적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국에서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사절단은 영선사이다(1881.9~1882.11).

개화 반대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에) 비밀리에 파견된 사절단은 조사 시찰단이다(1881.4.10~7.2). 조사 시찰단은 사실상 제3차 수신사라 볼 수 있다.

 

정답>

맨왼쪽 말풍선에 '개화 정책에 대한 불만과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로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말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가운데 말풍선에는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 하층민도 가담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고종은 흥선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사건'은 고종 19년인 188269(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임을 알 수 있다(~713일까지 진행).

임오군란 결과 조선과 일본은 같은 해 8월에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고, 여기에는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할 수 있게 허락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이 외 배상금 지급, 일본에 사죄단 파견 등).

오답 해설>

김옥균(1851~1894)과 박영효(1861~1939) 등의 급진[변법] 개화파가 주도한 사건은 갑신정변이다(1884.12).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전개한 것으로는 독립 협회의 자강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임오군란에서는 입헌 군주제 수립과 관련된 어떠한 주장도 제기되지 않았다. 참고로 이후 애국 계몽 운동 단체 중에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헌정 연구회'가 있다(1905.5).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12월의 일이다.

전국 각지에 척화비가 건립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신미양요이다(1871.5).

 

정답>

왼쪽 그림에 '이제 화약을 체결하였으니 전주성에서 해산하시오'라는 말과 '알겠소. 대신 우리 농민군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오'라는 말이 나와 있다(전주 화약, 1894.5.8, 이하 모두 음력). 오른쪽 그림에는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였으니 왜적을 몰아내는 데 온 힘을 다합시다'(2차 봉기, 1894.9.18)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동학 농민 운동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것은 1894723일의 일이다(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 사건의 전개 : 삼복보 고백 황장집 갑공

삼례집회 김제 1892 1차교조신원운동
복합상소 한성 1893 2
보은집회 3차 정치적 색채, 제폭구민, 척왜양창의
고부민란 1


1 창의문, 사발통문, 조병갑 남접
-정치적
반봉건
사회개혁운동
백산 백산무장봉기(94)-무장조직화
황토현전투 2 절정기 vs지방군
장성싸움 vs 경군(홍계훈)
집강소 3 전주화약(자치정부)
갑오개혁, 청일전쟁(7, 텐진조약에의해서)
공주우금치
전투
2
봉기
4 항일구국운동,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접(정치)+북접(종교)/ 대패
 

오답 해설>

농민군이 고부 백산에서 4대 강령을 발표한 것은 1894325~26일의 일이다(고부 백산 대회).

(공주)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것은 18941115일부터 일주일 간의 일이다(공주 우금치 전투).

(충북) 보은에서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린 것은 18933월의 일이다.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해 (전북의) 고부(현 정읍)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은 18941월의 일이다.

 

 

정답>

()의 위 1'문벌, 양반과 상인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의 1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혁파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분제를 혁파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는 제1차 갑오개혁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1894.7~1894.12).

()의 위 1'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의 1에는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켜 서로 뒤섞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는 제2차 갑오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임을 알 수 있다(1895.1).

()에는 '대군주 폐하께서 내리신 조칙에서, 짐이 신민(臣民)에 앞서 머리카락을 자르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만국과 나란히 서는 대업을 이루라라고 하셨다. 을미개혁 때(1895.8~1896.2) 시행된 단발령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95.12).

 

이상을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정답>

'이제 지계사무(地契事務)를 강원도에서 실시하여 영동은 울진군부터 시작하고, 영서는 춘천군부터 시작하여 토지를 개량(改量)한 후 관계(官契)를 발급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전답가사(田畓家舍)를 강원도에 두고 있는 인민은 구권(舊券)을 가지고 음력 815일 내로 토지가 있는 군에 가서 관계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광무''지계아문'이 제시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 밑줄친 '관계(官契)'는 곧 광무개혁에서 양전 사업을 펼치면서 발급한 지계(地契)임을 알 수 있다(1899~1904).

원수부가 설치된 것은18996월의 일이다. 광무개혁 시기는 보통 고종 33(1896)에서 광무 8(1904)까지로 본다.

오답 해설>

영남만인소가 올라온 것은 1881(고종 18) 2월의 일이다.

남연군 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에게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한 것은 1868(고종 5) 5월이다. .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관민들에 의해 불텨워진 것은 1866(고종 3) 7월의 일이다.

통신사가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태종 13(1413)을 시작으로 순조 11(1811)까지 모두 20(조선 전기 8, 조선 후기 12) 파견되었다. 참고로 일본 막부의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은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정답>

1조에 '중추원은 아래에 열거한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議定)하는 곳으로 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혹은 개정하는 것에 관한 사항, 2. 의정부에서 토의를 거쳐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일체 사항'이 나와 있다. 3조에는 '의장은 대황제 폐하가 글로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에서 공천에 따라 폐하가 칙수하며, 의관은 그 절반은 정부에서 나라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을 회의에서 상주하여 추천하고, 그 절반은 인민협회(人民協會) 중에서 27세 이상되는 사람이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해서 선거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89810월 개최된 관민 공동회 결과를 반영하여 당시 의정부 참정이었던 죽천 박정양(1841~1905)이 같은 해 114일에 반포한 '(의회식) 중추원 신관제'임을 알 수 있다.

관민 공동회 결과 헌의 6조가 결의된 바 있다.

오답 해설>

105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민회의 국내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1911.9).

(흥선 대원군에 의해) 사창제가 실시된 것은 1867(고종 4)의 일이다.

13도 창의군이 활동한 것은 19081월의 일이다(서울 진공 작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가 파견된 것은 19074월의 일이다(6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7월까지 활동).

 

정답>

'사진은 제물포에서 ()()로 수차례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한 갤릭호와 이민자 여권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02년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첫 이민자 백여 명이 떠난 이후 3년간 약 7천 명이 넘는 한국인이 ()에 이주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미주의 하와이임을 알 수 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1881~1928)의 주도로 대조선 국민군단이 조직된 것은 19146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이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한 곳인 일본 도쿄이다(1932.1.8).

한인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된 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다(1911.12).

민족 교육을 위해 (이상설 등에 의해) 서전서숙을 설립한 곳은 북간도(동만주) 용정이다(1906.8).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 강습소가 세워진 곳은 서간도(남만주)이다(1911.6).

정답>

'국권 침탈의 아픔이 서린 중명전'이라는 제목 아래 소개글이 제시되어 있다. 소개글에는 '지상 2층 지하 1층의 붉은 벽돌 건물인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하였는데, 황실의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04년 경운궁의 대화재 이후 고종 황제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곳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의 체결을 강요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19051117일에 강요된 '을사늑약'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종 황제는 퇴위 후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을사늑약 제3조에는 '1명의 통감'을 둔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0621일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아관 파천이 일어난 것은 18962월의 일이다(1896.2.11). 그 전해에 일어났던 을미사변이 직접적인 배경이라 볼 수 있다(고종의 신변 불안).

청일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 갑신정변 종결 후 청과 일본이 맺은 톈진 조약이 '출병'의 계기[빌미]로 작용하였다(1885.4).

대한 제국의 군대 해산을 규정한 것은 1907724일에 체결된 한일 신협약이다('정미 7조약'이라고도 함).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는 조항이 들어간 것은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다(1886.5).

 

정답>

'이 정부는 지도에 표시된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후 이 정부가 전개한 활동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9월의 일이다(1940.9.17).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는 건국 강령을 공포한 것은 194111월의 일이다(1941.11.28).

오답 해설>

(북로 군정서군 중심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것은 192010월의 일이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해조신문이 발간된 것은 19082월의 일이다.

신민회는 평북 정주에 오산 학교를,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전개하였다(190712/19089).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임시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한 것은 19199월의 일이다(1919.9.23).

정답>

2조로 '즉결은 정식 재판을 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빙을 취조한 후 곧바로 언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11조로 '8, 9조에 의한 유치 일수는 구류의 형기에 산입하고, 태형의 언도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1일을 태 5로 절산*하여 태 수에 산입하며, 벌금 또는 과료의 언도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1일을 1원으로 절산하여 그 금액에 산입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일 병탄 직후인 191012, 제령 제10호로 제정된 '범죄즉결례'임을 알 수 있다.

* 절산(折算): 타산(打算)과 같은 말로, '이해 관계를 셈쳐 본다'. '이득과 손실을 헤아려 본다'는 뜻이다.

일제는 1910년대 내내 강압적 통치를 목적으로 헌병 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오답 해설>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를 발행한 것은 고종 20년인 188310월의 일이다.

황국 중앙 총상회가 상권 수호 운동을 주도한 것은 광무 2년인 18987월의 일이다.

근대적 개혁 추진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것은 고종 31년인 1894625일의 일이다(~1894.12.17).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된 것은 광무 11년인 19072월의 일이다(~1908.7).

 

 

정답>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재일본 동경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11'의 명의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192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 독립 선언서'임을 알 수 있다.

민족 대표 33인 명의의 독립 선언서가 발표된 것은 191931일의 일이다(기미 독립 선언서).

오답 해설>

박상진(1884~1921) 등이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결성한 것은 19157월의 일이다.

황성신문에 [장지연(1864~1921)]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것은 19051120일의 일이다.

독립 협회가 중심이 되어 독립문을 건립한 것은 189711월의 일이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임병찬(1851~1916)에 의해 (대한) 독립 의군부가 조직된 것은 19129월의 일이다.

 

정답>

'진주에 있는 이곳은 독립운동가 깅상호 선생(1882~1957)의 묘입니다. 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는 취지 아래 백정에 대한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에 앞장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운동'은 일제 강점기 경남 진주에서부터 전개된 형평 운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9234월 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가 조직되어 백정(白丁)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맞섰다. 참고로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오답 해설>

어린이날을 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한 것은 소년 운동이다(1923.5/1923.3). 천도교 소년회가 주도하였다.

계몽 서적의 보급을 위해 태극 서관(출판사)을 설립한 것은 19085월로 신민회의 산업 경제 활동에 속한다(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은 '3·1 운동'이다(1919/3/1).

라이징 선 석유 회사의 조선인 구타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운동은 원산 총파업[(노동 운동]이다(1929.1~4).

 
 

정답>

'민족을 이끌 초인을 염원한 ○○○'라는 제목 아래 생몰년(1904~1944)과 생애 및 활동이 제시되어 있다. 이어 '본명은 이원록으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이 세운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임을 알 수 있다.

이육사는 저항시 광야, 절정 등을 발표하였다.

오답 해설>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의열단원 김상옥(1890~1923)이다(1923.1).

(서울 명동 성당 앞에서) 친일파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인물은 이재명(1886~1910)이다(1909.12).

영화 아리랑의 제작, 감독, 주연을 맡은 인물은 나운규(1902~1937)이다. 영화 아리랑은 1926101일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면서 2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상영되었다.

조선 국혼을 강조하는 한국통사를 저술한 인물은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15.6).

정답>

'우리 학회는 1929(5월에) 조직되어 남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던 ()/를 조명하는 학술 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발표 주제로 '1. 영릉가 전투의 전개 과정', '2. 1930년대 한중 항일 연합 작전의 성과', '3. 총사령 양세봉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조선 혁명당 소속의 조선 혁명군임을 알 수 있다. 영릉가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323월에서 7월까지이다.

(조선 혁명군과 중국 의용군이 연합하여) 흥경성 전투를 벌인 것은 19336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호가장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4112월의 일이다. 호가장 전투는 조선 의용대(화북 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호가장은 중국 하북성 태항산 줄기에 닿는 작은 마을이다.

대전자령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337월이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싸웠다.

중국 팔로군에 편제되어 항일 전선에 참여한 부대는 조선 의용군이다(1943년 이후부터 군정학교 학생과 교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로군에 배속).

연합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한 부대는 한국 광복군이다. 한국 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으로 1943810여 명의 비전투 대원들(인면전구공작대)을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였다(·영 군사 상호 협정서 체결). 이들은 인도 캘커타에서 특수공작전과 대적선전방송과 관련된 훈련을 받고 19442월부터 그와 관련된 활동을 펼쳤다.

 

정답>

  밑줄친 '의거'를 일으킨 단체는 김구에 의해 193110월에 만들어진 한인 애국단임을 알 수 있다. 윤봉길(1908~1932)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것은 1932429일이다.

한인 애국단은 백범 김구(1876~1949)를 단장으로 하여 활발한 의열 활동을 펼쳤다.

오답 해설>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은 단체는 의열단이다(1919.11).

조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가 단원으로 활동한 단체는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이다(1919.3, 소련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 강우규 의사(1855~1920)191992일 서울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현장에 있던 신문기자,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 최종적으로 3명 사망). 19201129일 서대문 형무소(구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이상재 등의 주도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이다(1922.11).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지원한 단체는 신간회이다(1927.2).

 

 

정답>

'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은 1229일 오전 1030분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신문 기자단과 회견하고 신탁 통치에 관한 질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일문일답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신탁 통치는 조선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코자 함이 목적일 것이다. 우선 조선인이 당면한 경제 산업에 있어 유의하여 신탁 관리 문제로 모든 기관이 중지 상태로 들어가지 않기를 요망한다. 현 단계에 이르러 진실한 냉정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4512월 채택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삼상) 회의 결정문(일명 '모스크바 협정-한국에 관한 결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것은 19451216일의 일이다(~28). 여기서 모스크바 삼국 외상(삼상) 회의 결정문이 채택되었다.

오답 해설>

(좌우 합작 위원회에 의해) 좌우 합작 7원칙이 발표된 것은 1946107일의 일이다.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19465월의 일이다(1946.3.20~5.9).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구성된 것은 194810월의 일이다(1948.10.23).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결의된 것은 1948226일의 일이다.

정답>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한 제1사단은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공세에 맞서 83일부터 92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전투에서 제1사단 12연대는 특공대를 편성,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506·25 전쟁 초에 치러진 낙동강 방어전 전투들 중 국군 제1사단(학도병 500여 명도 포함)이 북한군 제2군단(3개 사단 규모)의 총공세를 물리친 '다부동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당시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대구를 일정 기간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에는 '개성에서 열린 첫 정전 회담에서 UN군 대표단은 어떠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문제의 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동시에 침략 재발의 방지를 보장하는 화평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공산군 대표단에게 경고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개성에서 첫 정전 회담이 열린 것은 1951710일이다. 이후 이듬해인 19527월에 개성에서 다시 본회담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으나 전쟁 포로 문제 등으로 인해 9개월 간 회담이 중지되었다.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의해) 흥남 철수 작전이 전개된 것은 19501215일에서 1223일까지의 일이다.

오답 해설>

애치슨 선언이 발표된 것은 전쟁 직전인 19501월의 일이다(1950.1.10).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4810월의 일이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은 전쟁 직후인 195310월의 일이다(1953.10.1).

부산에서 발췌 개헌안이 통과된 것은 전쟁 중인 19527월의 일이다(1952.7.4).

정답>

'이것은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도표로서 분야별 주요 계획, 국토 건설 현황 등이 그림과 그래프로 표현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계획이 실시된 시기의 경제 상황에 대해 말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7년에서 1971년까지이다.

경부 고속 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77일의 일이다(196821일 착공).

오답 해설>

귀속 재산 처리법이 제정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4912월의 일이다(1949.12.19). 귀속 재산을 유효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산업 부흥과 국민 경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참고로 '귀속 재산'이란 미군정에 몰수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소유의 재산(농지, 주택, 기업 등)을 일컫는 말이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12월의 일이다.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6월의 일이다(발효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23).

대통령의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8월의 일이다(1993.8.12).

 

정답>

'노래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 아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시되어 있다. 해설에서 '이 곡은 ()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고() 윤상원과 광주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고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된 노래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997()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기념식에서 제창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19805월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다(항쟁 기간 1980518~27,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1980517)

오답 해설>

3·1 민주 구국 선언이 (재야인사들에 의해 서울 명동 성당에서) 발표된 것은 19763월의 일이다. 유신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악소 조항인 '긴급 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4·13 호헌 조치 철폐를 요구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 계기가 된 민주화 운동은 1960년의 4·19 혁명이다.

시위 도중 대학생 이한열(1966~1987)이 희생된 민주화 운동은 6월 민주 항쟁이다. 198769,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5일 만 2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