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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해설 51회 (1)

정답>

'() 시대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모시는 글로 '우리 박물관에서는 농경과 정착 생활이 시작된 ()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덧무늬 토기,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상, 갈돌과 갈판 등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았다.

오답 해설>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이다.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한 것은 청동기 시대이다.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 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이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 역시 초기 철기 시대이다. 참고로 이때 철제 무기도 만들어 사용하였다(이로써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만 사용).

정답>

'이 유물은 중국 지린성 쑹화강 유역의 둥퇀산 유적에서 출토된 ()의 금동제 가면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에는 여러 가()들이 별도로 관할하는 사출도가 있었으며,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풍습이 행해졌다고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초기 국가, 부여임을 알 수 있다.

부여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오답 해설>

신지, 읍차라고 불린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는 삼한이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 역시 삼한이다.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린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소나 말로 변상한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책화).

 

정답>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사방(四方)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또 살펴보건대 옛날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나 왕()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방언으로만 부르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은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증왕(재위 500-514)임을 알 수 있다. '신라'라는 국명을 정하고 '()'의 호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지증왕 4년인 503년의 일이다.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시킨 것은 지증왕 13년인 512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병부를 설치한 것은 법흥왕 4년인 517년이고, 율령을 반포한 것은 법흥왕 7년인 520년의 일이다.

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진흥왕 23년인 562년의 일이다.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진흥시킨 것은 신문왕 2년인 682년의 일이다.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한 것은 선덕 여왕 12년인 643년의 일이다.

 

정답>

'학술 대회 안내'라는 제목 아래 '올해는 백제의 고분 중 피장자와 축조 연대가 확인되는 유일한 무덤인 ()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학회는 이를 기념하여 '() 출토 유물로 본 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학슬 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발표 주제로는 '진묘수(제시된 자신)를 통해 본 도교 사상, 금동제 신발의 제작 기법 분석, 금송으로 만든 관을 통해 본 일본과의 교류'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백제 공주의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무령왕릉은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축조하였다(벽돌 무덤). 벽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답 해설>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 위치한 것은 백제 한성 시대 고구려 계통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나무로 곽을 짜고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은 신라의 통일 이전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로 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출토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 대향로가 출토된 곳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이다(1993년 발견, 국보 제287).

무덤의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의 일이다. 김유신 묘가 대표적이다.

정답>

'검모잠이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검모잠(?~670)이 고구려 부흥 운동을 펼치다 피살된 것은 670년의 일이다(고구려 부흥 운동은 670~674).

평양성이 함락된 668(고구려 멸망)과 매소성 전투가 벌어진 675년 사이의 시기인 '()'에 해당한다.

정답>

'부석사 창건 설화'라는 제목 아래 '당에 유학했던 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그를 사모했던 선묘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하여 귀국길을 도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신라에 돌아온 대사는 불법을 전파하는 중 자신이 원하는 절을 찾았는데 그곳은 이미 다른 종파의 무리들이 있어 선묘룡이 나타나 공중에서 커다란 바위로 변신하여 절의 지붕 위에서 떨어질 듯 말 듯 하자 많은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러한 연유로 이 절을 '돌이 공중에 떴다'는 의미의 부석사(浮石寺)로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대사'는 원묘국사 의상(625~702)임을 알 수 있다. 의상은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경북 영주에서) 부석사를 세웠다.

의상은 또한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668, 문무왕 8).

오답 해설>

향가 모음집인 삼대목이 편찬된 것은 진성 여왕 2년인 888년의 일이다.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무애가를 지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 이는 화쟁국사 원효(617~686)이다.

화랑도의 규범으로 세속 5계를 제시한 이는 원광(555~638)이다(601, 진평왕 23).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이는 혜초(704~787)이다(727, 성덕왕 26).

정답>

왼쪽 말풍선에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녹진에게 대아찬(5관등)의 관등을 내리노라'는 말이 나와 있다.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것은 (통일) 신라 헌덕왕 14년인 822년의 일이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시무 10조를 바친 최치원을 아찬(6관등)으로 삼겠노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최치원(857~?)이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조를 바친 것은 894(진성 여왕 8)의 일이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봉기한 것은 진성 여왕 3년인 889년의 일이다(사벌주는 지금의 경북 상주)

오답 해설>

이차돈(506~527)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7년인 687년이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문왕 9년인 689년의 일이다.

거칠부(502~579)가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한 것은 신라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마립간으로 바뀐 것은 내물왕[내물마립간] (재위 356-402)의 일이다(17).

정답>

해외 소재 우리 문화유산(일본 편)이라는 제목 아래 '사진은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의 함화 4년명 불비상(佛碑像)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비문이 있다. 비문은 함화 4년에 허왕부(許王府) 관리인 조문휴의 어머니가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의 국왕이 '허왕' 등의 제후를 거느린 황제와 같은 위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선왕 대(재위 818-830)에 이르러 515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

오답 해설>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운영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7, 신문왕 7).

성균관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교육한 국가는 고려와 조선이다.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에 성균관으로 복구하면서(1308년 충선왕이 복귀하면서 '성균감''성균관'으로 개칭)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명실공히 유학 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 학부가 되었다.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국가는 신라이다. 상수리 제도는 각 주의 지방 세력의 자제들 중 한 명을 뽑아 중앙에 볼모로 와 있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5세기 이전부터 실시 추정). 고려의 기인 제도, 조선의 경저리 제도로 이어졌다.

내신좌평, 위사좌평 등 6좌평의 관제를 마련한 국가는 백제이다. 6좌평 중 내신좌평이 정사암 회의 수장 역할을 겸하면서 상좌평으로 불렸다.

 
 
 

정답>

'국보 제11''전라북도 익산시'에 소재하며 '현존하는 삼국 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목탑 양식을 반영하여 건립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기둥(심주)4층까지 연속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1층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의 기록을 통해 석탑의 건립 연도가 639(무왕 40)으로 명확하게 밝혀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임을 알 수 있다(선지 20186월에 복원된 것임).

오답 해설>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7세기 제작)

신라의 경주 불국사에 위치한 다보탑이다(751, 경덕왕 10).

발해의 영광탑이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조선족자치현 서북쪽 탑산에 위치해 있다. 8~10세기에 건립된 발해 시대의 누각식 전탑(모전 석탑)으로 창바이 영광탑 또는 발해 전탑으로도 불린다. 1908년 장펑타이라는 청의 관리가 이 탑에 대해 공자 사당의 영광전(靈光殿)처럼 오랜 세월 속에서도 의연하게 남아 있다고 평한 뒤로 영광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이다(고려 전기, 백제계 석탑, 국보 제289).

 

정답>

()'날이 밝아오자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곡식더미 위에 앉히고는 군신의 예를 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며, 왕공(王公)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微服)* 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왕건이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려 건국, 918).

* 미복(微服): 지위가 높은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남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는 남루한 옷

()에는 '여름 6월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더불어 나주로 달아나 입조를 요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도착하자 그를 상보(尙父)라 일컫고 남궁(南宮)을 객관(客館)으로 주었다. 지위를 백관의 위에 두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견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한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935).

(고려군과 후백제군 사이에) 공산 전투가 벌어진 것은 927년의 일이다. 이때 고려군은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하였다[개국 공신이자 충신인 신숭겸(?~927)이 왕건을 탈출시키려고 대신 전사).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이다.

오답 해설>

견훤(867~936)이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것은 900년의 일이다.

(왕의 장인인)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장보고(?~846)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통일)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의 일이다[~851(문성왕 13)].

(견훤의 장자인) 신검(?~?)이 일리천에서 고려군에게 패배한 것은 936년의 일이다(936.9).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정답>

'목종 5(1002)6위의 직원을 마련하여 두었는데, 뒤에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2군을 설치하고, 6위의 위에 있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뒤에 또 중방을 설치하고, 2·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이 모두 회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의 중앙군인 26위와 중방의 설치에 대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고관들의 합좌 기구인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8년인 98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한 국가는 발해이다(즉 중정대는 발해의 감찰 기관).

95소경의 지방 제도를 운영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5, 신문왕 5).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다(788, 원성왕 4).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국가는 백제이다.

 
 

정답>

'이 그림은 윤관이 ()/를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설치한 후 고려의 경계를 알리는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척경입비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여진'임을 알 수 있다.

윤관(?~1111)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등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조직하였다(1104, 숙종 9).

오답 해설>

[최무선(1325~1395)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두어 화포를 제작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화포를 제작한 것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서이다.

박위(?~1398)를 파견하여 근거지를 토벌한 대상 역시 왜구이다(1389, 고려 창왕 원년). 이후 조선 태조 5년인 1396(김사형), 조선 세종 원년인 1419(이종무) 때도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연개소문(?~665)을 보내어 천리장성을 축조하게 한 것은 중국 당()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631(영류왕 14)~647(보장왕 6)].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은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1236(고종 23)~1251(고종 38)].

 
 

정답>

'주전도감에서 해동통보 발행'이라는 제목 아래 '일전에 왕께서 화폐를 주조하여 재추와 문무 관료 및 군인에게 지급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이에 따라 주전도감에서 해동통보를 발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숙종에 의해 해동통보가 발행된 것은 재위 7년인 1102년의 일이다.

벽란도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다. 대송 무역의 거점이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오답 해설>

구황촬요는 조선 명종 9(1554)에 간행된 일종의 구황서(救荒書)이다(흉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책).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이 설치된 것은 신라 지증왕 대의 일이다(509, 지증왕 10).

초량 왜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 숙종 4년인 1678년의 일이다. 동래 상인인 내상이 왜관 개시를 통해 대일 무역에 종사하였다.

낙랑군(과 왜 등)에 덩이쇠를 수출한 나라는 초기 국가, 변한이다.

 

 

정답>

'만적 등 6명이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복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경인년과 계사년 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賤隸)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제시된 자료에서 '경인년'은 무신 정변이 일어난 1170(의종 24)을 가리키며, '계사년'은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1173(명종 3)을 가리킨다.

최우가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여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인종 13년인 1135년의 일이다.

쌍기가 과거제의 시행을 건의하여 과거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난을 일으킨 것은 고려 인종 4년인 1126년의 일이다.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것은 고려 의종 24년인 1170년의 일이다(무신 정변).

 

정답>

'이것은 황산 대첩비의 탁본이다. 비문에는 당시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였던 ()/가 고려군을 이끌고 전라도 황산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황산 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1335~1408)임을 알 수 있다[황산 대첩(1380, 고려 우왕 6)].

이성계는 고려 우왕 14년인 1388(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였다(위화도 회군).

오답 해설>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인물은 김윤후(?~?)이다[몽골의 제2차 침입(1232, 고종 19)].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한 인물은 강조(?~1010)이다[강조의 정변, 1009(목종 12)].

교정별감이 되어 국정 전반을 장악한 인물은 최충헌(1149~1219)이다(1209, 희종 5).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서 개혁을 이끈 인물은 신돈(?~1371)이다(1366, 공민왕 15).

 

정답>

'이 목판의 글은 '불일보조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그가 지은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화두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참선법을 강조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불일)보조국사 지눌(1158~1210)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지눌은 정혜결사를 통해 불교 개혁에 앞장섰다.

오답 해설>

화왕계를 지어 국왕에게 바친 인물은 원효의 아들로 알려진 설총(655~?)이다.

천태종을 개창하여 불교 통합에 힘쓴 인물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다(1097, 숙종 2).

심성의 도야를 강조한 유불 일치설을 제창한 인물은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다.

불교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물은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다(1285, 충렬왕 11).

정답>

왼쪽의 말풍선에 '이승휴가 지은 이 책의 상권에는 중국의 역사가, 하권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의 말풍선에는 '이 책은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책'은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임을 알 수 있다(1287, 충렬왕 13).

제왕운기에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오답 해설>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책은 영재 유득공(1748~1809)의 발해고이다(1784, 조선 정조 8).

사초와 시정기를 바탕으로 편찬된 책은 '실록'이다.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본으로 간행된 책은 직지심체요절이다(1377, 우왕 3).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한 책은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정답>

'인물로 보는 고려의 성리학'이라는 제목 아래 '우리 박물관에서는 인물로 보는 고려의 성리학을 주제로 한국사를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강좌 순서로, '1강 안향, 2강 이제현, 3강 이색, 4강 정몽주, 5강 정도전'이 나와 있다.

(원의)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한 인물은 익재[역옹] 이제현(1287~1367)이다.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은 상왕이 된 고려 충선왕이 원의 연경에 세웠다(1314, 충숙왕 원년).

오답 해설>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제안한 인물은 (안향이 아니라) 최충헌(1149~1219)이다(1196, 고려 명종 26).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쓴 인물은 (이색이 아니라) 최충(984~1068)이다(1053, 고려 문종 7).

경제문감을 저술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인물은 (정몽주가 아니라) 삼봉 정도전(1342~1398)이다(1395, 태조 4).

성학십도에서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인물은 (정도전이 아니라) 퇴계 이황(1501~1570)이다(1568, 선조 원년).

 

정답>

'육조 직계제 부활하다'는 제목 아래 '계유년에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즉위한 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자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 조치는 형조의 사형수 판결을 제외한 육조의 서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으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육조 직계제가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계유정난(1453, 단종 원년)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즉위한 세조에 의해 단행된 육조 직계제 부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455, 세조 원년).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이 시행된 것은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의 재위 기간은 1455년에서 1468년까지). 참고로 태종 14년인 1414년에 육조 직계제가 처음 시행되었다가 세종 18년인 1436년이 다시 채택됨으로써 폐지된 바 있다.

오답 해설>

주자소가 설치되어 계미자가 주조된 것은 태종 3년인 1403년의 일이다.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일이다.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대전회통이 편찬된 것은 고종 2년인 1865년의 일이다.

제한된 범위의 무역을 허용한 계해약조가 체결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정답>

국보 제303호로, 2001년에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조선 시대 왕명의 출납, 행정 사무, 의례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로, 편년체로 기록되었으며, 승지가 이를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최종 완성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도 활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임진왜란 때 이전의 기록이 소실되어 인조 원년인 1623년부터 고종 31년인 1894년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남아 있다.

오답 해설>

비국* 등록이라고도 불린 문화유산은 비변사등록이다. 비변사등록은 조선 중·후기의 국가 최고 회의 기관이었던 비변사의 활동에 대한 일기체 기록이다(국보 제152). 임진왜란 당시 다른 기록과 함께 소실되어 이전의 것은 사라지고, 현재는 광해군 9년인 1617년부터 고종 29년인 1892년까지 총 276년 간의 기록만 남아 있다.

* 비변사(備邊司)를 비국(備局묘당(廟堂주사(籌司)라고도 하였다.

세가, , 열전 등으로 구성된 문화유산(역사서)은 고려사이다(1451, 문종 원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1145, 인종 23).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일기에서 유래한 문화유산은 일성록이다(정조의 존현각일기에서 유래, 영조 36년인 1760년부터 기록되기 시작).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로 대한 제국이 망한 1910년까지 약 150년간 기록되었다.

 

 

정답>

'교활한 아전이 여러 가지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수령이 듣고 보는 것으로써 다 감찰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앙의 경재소와 지방의 ()/가 서로 들은 대로 규찰하여 교활한 아전을 억제시키고 향촌의 풍속을 유지시킨다면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유향소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출처가 성종실록인 것에서 성종 대의 '유향소 복립 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488, 성종 19).*

* 세조 14년인 1468년에 폐지되었다. 태조 6년인 1406년에 유향소가 폐지되었다가 세종 10년인 1438년에 부활된 것이 세조 때에 다시 폐지된 것이다(즉 세종 대도 '유향소 복립 운동'이 있었음).

유향소는 선발된 좌수와 별감에 의해 운영되었다.

오답 해설>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한 기구는 수령이다.

5품 이하의 관원에 대한 서경권을 가진 기구는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건의로 혁파된 기구는 소격서이다. 소격서는 도교의 보존과 도교 의식을 위하여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중종 13년인 1518년에 폐지되었다(이후 복설되었으나 임진왜란 뒤 다시 폐지).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기구는 향교이다.

정답>

'이곳 파주 자운 서원에는 ()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는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과 지식을 담은 성학집요를 집필하여 임금에게 바쳤으며, 해주 향약 등을 시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는 율곡 이이(1536~1584)임을 알 수 있다(성학집요를 집필하여 바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

이이가 다양한 개혁 방안을 담은 동호문답을 저술한 것은 선조 2년인 1569년의 일이다(그 외 만언봉사, 격몽요결 등 다수 저술).

오답 해설>

불씨잡변을 지어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한 인물은 삼봉 정도전(1342~1398)이다(1394, 태조 3).

노론의 영수로 북벌론을 주장한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1607~1689)이다. 효종 즉위년인 1649,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한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이다.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1852, 철종 3).

 

정답>

'·명 연합군, 평양성을 탈환하다'는 제목 아래 '며칠 전 우리 군사들이 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번 승리는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킬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선조 26) 1월의 일이다.

이순신(1545~1598)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선조 30년인 15979월의 일이다(명량 대첩).

오답 해설>

최무선(1325~1395)이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것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의 일이다.

신립(1546~1592)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운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4월의 일이다.

김종서(1383~1453)6진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세종 16년인 1434년부터의 일이다(이후 10여 년에 걸쳐 개척).

배중손(?~1271)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에서 항전한 것은 고려 원종 11년에서 12년까지의 일이다(1270.6~1271.5).

 

정답>

()'양사(兩司)가 합계하기를, 영창 대군 이의(李㼁)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이미 역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이에 대해 자복(自服)한 역적만도 한두 명에 그치지 않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왕법은 지극히 엄한 만큼 결코 용서해주기 어려우니 유사로 하여금 법대로 적용하여 처리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광해군 재위 당시 대북파가 영창 대군과 반대파인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계축옥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613, 광해군 5). 이로 인해 영창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1562~1613)이 반역죄로 사사되고, 영창 대군도 폐서인(廢庶人)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에는 '앞서 왕에게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고해바친 자가 있었다. 하지만 임금은, 필시 반역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전은 그때 이괄의 군영에 있었고 이괄은 결국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여러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이괄(1587~1624)의 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인이 (광해군을 폐위하는)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1623년의 일이다(인조반정).

오답 해설>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조직된 것은 정조 17년인 1793년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옥사가 발생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기축옥사).

허적과 윤휴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된 것은 숙종 6년의 일이다(경신환국).

(인조의 계비인) 자의 대비(장렬 왕후, 1624~1688)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현종 대의 일이다. 1차 예송(1659, 기해예송) 때는 서인의 1년설(기년복), 2차 예송(1674, 갑인예송) 때는 남인의 1년설(기년복)이 받아들여졌다.

 

정답>

'명릉*은 이 왕과 왕비인 인현 왕후의 무덤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화 창에 '경신환국 등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서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점', '대동법을 황해도까지 확대 시행하였다는 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밑줄친 '이 왕'은 조선의 제19대 국왕인 숙종(재위 1674-1720)임을 알 수 있다. 숙종 3(1677)에 경상도, 숙종 34(1708)에 황해도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함으로써 비로소 대동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1608~1708).

*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있다.

수도 방어를 위하여 금위영이 창설된 것은 숙종 8년인 1682년의 일이다. 이로써 5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오답 해설>

국가의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이 반포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대(재위 1649-1659)이다. 효종 5년인 1654(변급), 효종 9년인 1658(신류) 두 차례 파견되었다.

농민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주고자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영조 26년인 1750년의 일이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가 실시된 것은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