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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해설

풀다보면 흐름이 보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49회 (1)

정답> ②

'금속이 우리의 삶으로, (가)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제목하에 '우리 박물관에서는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가) 시대 특별전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비파형 동검, 거푸집, 민무늬 토기 등 당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을 준비하였으니 많은 관람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청동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오답 해설>

① 주로 동굴이나 막집에서 거주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③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여 식량을 생산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④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⑤ 대표적인 도구로 주먹도끼, 찍개 등을 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정답> ⑤

'위만이 망명하여 호복을 하고 동쪽의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위만은 서쪽 변경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가)의 번병(藩屛)*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고 준왕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삼고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조선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위만 조선이 성립한 것은 기원전 194년의 일이다.

* 번병(藩屛) : 변경의 울타리

고조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를 두었다.

오답 해설>

① 국가 중대사를 정사암에서 논의한 나라는 백제이다. 정암사는 사비(지금의 부여) 근처의 호암사(虎巖寺)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②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사용한 나라는 신라이다. 신라의 제17대 내물 때(재위 356-402)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21대 소지 마립간 때(재위 479-500)까지 사용].

③ 여러 가(加)들이 다스리는 사출도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④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시행한 나라는 고구려이다(194, 고국천왕 16).

 

정답> ③

맨왼쪽 말풍선에 '신지, 읍차 등의 지배자가 있었던 나라에 대해 발표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삼한'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삼한에는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①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②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렸던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④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12배로 갚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책 12법).

⑤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였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정답> ②

'문화유산 답사 안내'라는 제목하에 '우리 지역의 역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지 5년이 된 바 이를 기념하여 답사를 준비하였으니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답사 경로로 '출발 → 부소산성 → 관북리 유적 → 정림사지 → 나성 → 능산리 고분군 → 도착'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지역'은 충남 부여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소산성과 나성은 사비 시대 성곽이며, 관북리 유적은 궁궐터이다.

백제 성왕이 재위 16년인 538년에 새롭게 수도를 정한 지역이 바로 사비, 즉 지금의 충남 부여이다. 이로써 웅진(공주) 시대가 막을 내리고 사비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장용영의 외영이 설치된 곳은 경기도 수원이다(1793, 정조 17).

③ 배중손(?~1271)이 삼별초를 지휘하였던 근거지는 전남 진도이다.

④ 한성근 부대가 서양 세력에 맞서 항전한 장소는 경기도 김포의 문수산성이다(병인양요, 1866).

⑤ 남북한 경제 협력 사업으로 설치된 공단의 위치는 개성[개경]이다(개성 공단).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 '금관국의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나도 들었다며, 우리 왕께서 그들을 예로써 대접하여 높은 벼슬을 주고, 그가 다스리던 금관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한 것은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의 일이다.

법흥왕은 재위 23년인 536년에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흥왕 6 관제정비(병부상대등), 공복제정, 불교공인,
율령제정, 건원(연호), 532 본가야(금관)정복

오답 해설>

①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통일) 신라 신문왕 7년인 687년의 일이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문왕 9년인 689년의 일이다.

③ 지방에 22담로를 두어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무령왕 대(재위 501-523)의 일이다.

④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인재를 등용한 것은 (통일)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⑤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한 것은 신라 선덕 여왕 12년인 643년의 일이다.

정답> ④

'서원경 부근 4개 촌락의 인구 수, 토지 종류와 면적, 소와 말의 수 등을 기록한 문서로,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문서의 내용을 통해 (가)이/가 촌락의 경제 상황 등을 세밀하게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라 촌락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서원경'은 지금의 충북 청주 지역이고 작성된 시기는 755년설(경덕왕 14), 816년설(헌덕왕 8), 876년설(헌강왕 6)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통일 신라에는 울산항, 당항성이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은병(활구)이 화폐로 제작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②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던 국가는 초기 국가, 고구려이다.

③ 목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직전법이 실시된 것은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정답> ④

(가)에 '살수에 이르러 [수의] 군대가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이 군사를 보내 그 후군을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둔위 장군 신세웅을 죽이니, [수의[ 군대가 걷잡을 수 없이 모두 무너져 9군의 장수와 병졸이 도망쳐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612, 고구려 영양왕 23).

(나)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함께 평양을 포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일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668).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은 642년의 일이다(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내세움).

오답 해설>

①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에 책봉된 것은 674년의 일이다(신라 문무왕 14).

②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힌 것은 311년의 일이다(고구려 미천왕 12).

③ 광개토 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은 400년의 일이다(고구려 광개토 대왕 10).

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킨 것은 475년의 일이다(고구려 장수왕 63). 이때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백제의 한성 시대도 끝났다(문주왕에 의해 웅진 천도).

정답> ②

'이것은 (가)의 중대성에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낸 외교 문서의 사본이다. 문서에는 정당성의 좌윤 하복연 등 주요 사신단의 명단과 두 나라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사신을 파견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대성'과 '정당성'라는 관제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시된 '(가)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일종의 국립 대학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오답 해설>

① 광군을 창설하여 외침에 대비한 국가는 고려이다(947, 고려 정조 2).

③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를 마련한 국가는 신라이다.

④ 9주 5소경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춘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다(685, 신문왕 5).

⑤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이 지배층을 이룬 국가는 백제이다.

정답> ④

삼국사기 신라 본기 검색창이 나와 있으며, 재위 1년(887)에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재위 2년(888)에 '삼대목을 편찬하다', 재위 3년(889)에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재위 10년(896)에 '서남쪽에서 적고적이라고 불리는 도적이 일어나다'는 내용이, 재위 11년(897)에 '태자 요*에게 왕위를 물러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신라의 제51대 왕인 진성 여왕(재위 887-897)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 태자 요: 신라 제52대 왕인 효공왕(재위 897-912)

고운 최치원(857~?)이 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건의한 것은 진성 여왕 8년인 894년의 일이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오답 해설>

① 왕의 장인인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의 일이다.

② 강조(?~1010)가 정변을 일으켜 김치양을 제거한 것은 고려 목종 12년인 1009년의 일이다(강조의 정변).

③ 거칠부(502~579)가 왕명을 받들어 국사를 편찬한 것은 신라 진흥왕 6년인 545년의 일이다.

⑤ 복신과 도침 등이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 것은 661년의 일이다(백제 부흥 운동).

정답> ⑤

맨왼쪽 말풍선에 '신라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송악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운 인물에 대해 말해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광평성 등 여러 정치 기구를 마련했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미륵불을 자칭하며 폭정을 일삼기도 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900년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연호를 무태로 고쳤다. 궁예는 국호와 연호를 자주 바꾸었다.

오답 해설>

① 후당, 오월에 사신을 보낸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이다.

② (아들들에 의해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된 후 고려에 귀부한 인물 역시 견훤이다(935).

③ 지방관을 감찰하고자 외사정을 파견한 인물은 신라의 문무왕이다(673, 문무왕 13).

④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을 전개한 인물은 장보고(?~846)이다[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신 의도는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투항한 김부의 공을 치하하고, 부호장 이하의 관직 등에 대한 일을 맡게 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는 답변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인터뷰의 왕은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다. 여기서 '김부'는 신라의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흑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918, 고려 태조 원년).

태조왕건 4대정책

민족융합(정략결혼, 기인제도, 사심관제도)

북진정책(청천강~영흥만) 서경중시

숭불정책(팔관회, 연등제)

애민정책(1/10)






기인

결혼

북진


숭불


만부

사건
훈요
10


 

오답 해설>

② 양현고를 두어 장학 기금을 마련한 왕은 예종이다(1119, 예종 14).

③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재정을 확충한 왕은 광종이다(956, 광종 7).

④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왕은 성종이다(983, 성종 2).

⑤ 전시과 제도를 (처음) 마련하여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한 왕은 경종이다(976, 경종 원년, 시정 전시과).

 

정답> ③

'우리 연구회에서는 고려 시대 문화유산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건조된 것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의 일이다(원각사는 현 서울 탑골 공원 자리에 세조 11년인 1465년에 세워짐).

오답 해설>

① 논산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936, 태조 19). 또 철확(鐵鑊)은 대형 철제솥이다.

② (석가모니불을 모신)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건물이다.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④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은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한 형식이다.

⑤ 청주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

정답> ⑤

위의 자료에 '화폐를 주조하는 법을 제정하여, 그것에 따라 주조한 전(錢) 15,000관을 재추와 문무 양반 및 군인에게 나누어 주어 화폐 사용의 시작점으로 삼고 이름을 해동통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해동통보가 발행된 것은 고려 숙종 7년인 1102년의 일이다.

아래의 자료에는 '주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음식을 파는 점포를 열고 백성에게 교역을 허락하여 전(錢)의 이로움을 알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을 언급한 자료로, 고려 숙종이 화폐의 주조는 물론 유통에도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개경]의 시전을 감독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제7대 왕인 목종 대(재위 997-1009)로 추정된다(경시서 자체는 그 이전에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 대(재위 1046-1083)에 이르러 경시서의 직제가 확대되었다. 참고로 경시서는 조선 초에도 계속 존속되다가 세조 12년(1466)에 관제를 개혁할 때 평시서(平市署)로 개칭되었다.

오답 해설>

①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동래 상인인 내상이 왜관 개시를 통해 대일 무역에 종사하였다.

③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都賈)가 활동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감자, 고구마 등의 (구황) 작물이 널리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④

(가)에 '동북면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동계(東界)에서 군대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전왕(前王)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이 장순석 등에게 거제(巨濟)로 가서 전왕을 받들어 계림에 모시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의종 복위 운동을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것은 고려 명종 3년인 1173년의 일이다.

(나)에는 '만적 등이 노비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기를, 장군과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만적 등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임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축출하고 집권한 직후)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한 것은 1196년(명종 26)의 일이다.

 

* 고려후기 사회의 동요

1. 무신난(1170)김보당의난(최초-문인),조위총의난(최대-무인,최충헌)공주명학소(1176,충순현으로승격, 망이망소이난, 일반농민반란+천민신분해당)전주관노의난김사미,효심의난최충헌집권(1196~1219)만적의난(1198,최초노비반란,개경)진주노비의난신라부흥운동(동경의난)고구려부흥운동(최광수의난,서경)백제부흥운동(이연년의난,남양)

 

오답 해설>

①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라 헌덕왕 14년인 822년의 일이다. 웅천주는 지금의 충남 공주 지역이다.

② 최우가 인사 행정 담당 기구로 정방을 설치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이다.

③ 이자겸과 척준경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운 것은 고려 인종 4년인 1126년의 일이다(이자겸의 난).

⑤ 김부식이 서경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것은 고려 인종 13년인 1135년의 일이다(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정답> ③

위의 자료에 '왕은 우리나라에 서적이 대단히 적어서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구리로 글자 자형을 떠서 활자를 만드는 대로 인출(印出)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주자소가 설치된 것은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의 일이다.

아래의 자료에는 '왕이 시경·서경··좌전의 고주본(古註本)을 자본(字本)으로 삼아 이직 등에게 십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미자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계미자는 조선 태종 3년에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왕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재위 1400-1418)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은 재위 원년인 1401년에 문하부 낭사를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태종
이방원
*금인고명문제해결-명에게인정
*1차왕자의난(방원의난)2차왕자의난(방간,박포의난)
*왕권강화: 사병혁파, 6조직계제(세조), 의정부(정종)
*양전사업, 공도정책, 사민정책
*호패법-유민방지,인력확보,노비포함,3(세조,광숙인)
*주자소설치(계미자),억불숭유(도첩제강화),노비변정도감,5부학당(4부학당),신문고,거북선(귀선)건조,아악서
*서얼차별법,재가금지(양반수제재)
*지방제도정비(8,부목군현)
*태조실록,속육전,원육전,동국사략(권근)
혼일강리도(동양최고세계지도)
 

오답 해설>

①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법령을 정비한 왕은 조선 성종이다(1476, 성종 7). 참고로 경국대전을 '반포'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이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한 것은 세조 7년인 1461년이다.

② 청과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왕은 조선 숙종이다(1712, 숙종 38).

④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한 왕은 조선 정조이다(1791, 정조 15).

⑤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왕은 조선 세조이다(1467, 세조 13).

정답> ⑤

'이곳 죽주산성은 송문주 장군이 (가)의 침입을 격퇴한 장소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빌미로 (가)이/가 쳐들어오자, 송문주 장군은 귀주성과 이곳에서 거듭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225년(고려 고종 12)에 있었던 '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빌미로 고려에 쳐들어온 국가는 몽골이다.

몽골 침입 시 고려의 최씨 무신 정권[최우]은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1236~1251). 참고로 고종 23년인 1236년에 피난 도읍지인 강화에 대장도감 본사를 두고, 진주(晋州) 관내의 남해현에 분사를 두어 판각을 분담시켰다.

오답 해설>

① 화통도감을 두어 화포를 제작한 것은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1377, 고려 우왕 3).

②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국방을 강화한 것은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의 일이다.

③ 별무반을 편성한 것은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의 일이고, 여진을 물리치고 동북 9성을 축조한 것은 3년 뒤인 1107년(고려 예종 2)의 일이다.

④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은 조선 선조 26년인 1593년의 일이다(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정답> ①

'왕이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고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기철 등이 군주의 위세를 방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뒤흔들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자신의 기분에 따라 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하여 정령(政令)이 원칙 없이 바뀌었고,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차지하고, 노비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다. 이제 다행히도 조종(祖宗)의 영령에 기대어 기철 등을 처단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기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시된 '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1374)임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재위 5년인 1356년에 원의 연호[지정]를 폐지하고, 구 관제를 복구하였다(중서문하성과 상서성 복구).




 
!


 

 
 


성총
관부
회복


일소

행성
폐지
민변

도감
거제

정비
녕부
다시
공격

중시
 


 

오답 해설>

② 원의 요청으로 일본 원정에 참여한 고려의 왕으로는 원종과 충렬왕이 있다[제1차 원정 → 1274년(원종 15)/제2차 원정 → 1281년(충렬왕 7)].

③ 조준 등의 건의로 과전법을 제정한 고려의 왕은 공양왕이다(1391, 공양왕 3).

④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고 왕권을 회복한 고려의 왕은 우왕이다(1388, 우왕 14).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고려의 왕은 광종이다(958, 광종 9).

정답> ⑤

'이것은 악장가사에 실린 상대별곡(霜臺別曲)으로 '상대'는 관리를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은 (가)을/를 의미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의 대사헌을 역임한 권근은 이 가사에서 관원들이 일을 끝내고 연회를 즐기는 장면 등을 흥미롭게 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 시대 3사 중 하나인 사헌부임을 알 수 있다. 사헌부의 별칭으로는 상대 외에도 헌부·백부(柏府)·오대(烏臺) 등이 있었다.

사헌부는 5품 이하의 관리 임명 과정에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은대(銀臺)라고도 불린 조선의 기구는 왕명의 출납을 맡은 비서 기관인 승정원이다.

② 집현전의 학문 연구 기능을 계승한 조선의 기구는 홍문관이다(1478, 성종 9). 홍문관의 등장으로 이른바 '언론 3사'가 성립하였다.

③ 서얼 출신 학자들이 검서관에 등용된 기구는 규장각이다(1776, 정조 즉위년).

④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정 최고 기구로 성장한 기구는 비변사이다(1510, 중종 5). 비변사는 처음 3포 왜란 시 설치(임시 군무 협의 기구)되었으며, 을묘왜변 시 상설 기구화(1555, 명종 10)되었다.

정답> ⑤

'이것은 능주 목사 민여로가 건립한 정암 선생 적려 유허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정암 선생은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등을 추진하다가 이 사건으로 능주에 유배되었다'는 네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사건'은 조선 중종 14년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임을 알 수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도학 정치를 펼치다가 사화로 희생되었다. 참고로 조광조가 귀양 간 '능주'는 전남 화순의 옛 지명이다.

기묘사화는 위훈 삭제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이 원인이었다.

오답 해설>

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된 사화는 무오사화이다(1498, 연산군 4).

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는 경신환국(1680, 숙종 6)과 갑술환국(1694, 숙종 20)을 들 수 있다.

③ 윤임 일파가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은 을사사화이다(1545, 명종 원년).

④ 상왕의 복위를 목적으로 성삼문 등이 일으킨 사건은 단종 복위 운동이다(1455, 세조 원년).

정답> ③

'동국여지승람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알려 줄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노사신, 양성지 등이 팔도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이 왕 때 완성한 지리지'라는 대답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각 지역의 지도와 지리, 풍속 등을 총 50권에 수록하였고, 이후 증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편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것은 조선 성종 12년인 1481년의 일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것은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의 일이다.

음악 이론 등을 집대성한 악학궤범이 간행된 것은 성종 24년인 1493년의 일이다.

* 성종 : 조선을 완성시킨 성군, 홍문관 >경연, 사림 대거 등용, 경국대전완성, 국조오례의(예법), 동국여지승람(팔도지리지 보완), 동문선(시문선집), 동국통감(고조선~고려 역사서), 삼국사절요(고조선~삼국시대 편년체 역사서), 악학궤범(의궤와 악보정리), 불교탄압 유교장려, 각 도에 관찰사 파견하고 부목군현에는 수령 파견, 봉수제도, 성균관

오답 해설>

① 전통 한의학을 정리한 동의보감이 (허준에 의해) 완성된 것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의 일이다.

② 역대 문물을 정리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된 것은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④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태종 2년인 1402년의 일이다.

⑤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인 칠정산 내편이 제작된 것은 세종 26년인 1444년의 일이다.

정답> ①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이라는 제목하에 맨왼쪽의 말풍선에 '옥포에서 26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옥포 해전이 있었던 것은 1592년(선조 25) 5월 7일의 일이다(옥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 가운데 말풍선에는 '견내량에 머물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술을 펼쳐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진주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 대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한산도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1592년 7월 8일의 일이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10여 척의 배로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량 대첩을 가리키는 것으로, 1597년(선조 30) 9월 16일의 일이다. 명량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위치한 해협이다(세칭 울돌목).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정답> ②

'사행(使行)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는 만상과 송상 등이 은과 인삼을 몰래 가지고 인부나 말 속에 섞여들어 물건을 팔아 이익을 꾀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되돌아올 때는 수레를 일부러 천천히 가게 하고 사신을 먼저 책문으로 나가게 하여 거리낄 것이 없게 한 뒤에 저희 마음대로 매매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책문 후시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 대청 무역 중 하나인 책문 후시(사무역인 후시 무역 중 한 곳)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공무역(관무역)은 개시 무역].

벽란도에서 송의 상인이 교역한 것은 고려 전기의 일이다(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

오답 해설>

① 전기수가 장시에서 책을 읽어주었던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중인이 시사(詩社)에서 시를 낭송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공인이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덕대가 물주의 자금으로 광산을 경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 '이 법은 공납의 폐단을 해결할 목적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다면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이 법을 확대 시행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렇다면 충청도에 먼저 시행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법'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처음 시행된 대동법임을 알 수 있다. 대동법은 이후 인조 원년인 1623년에 강원도, 효종 2년인 1651년에 충청도, 효종 9년인 1658년에 전라도, 숙종 3년인 1677년에 경상도, 숙종 34년인 1708년에 황해도에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기까지 100년여가 걸린 셈이다.

대동법에서는 특산물 대신 쌀, 베,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였다(1결당 쌀 12두).

오답 해설>

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한 것은 호포법이다(1871, 고종 8).

② 1결당 쌀 4~6두로 납부액을 고정한 것은 영정법이다(1635, 인조 13).

③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눈 것은 공법의 전분6등법이다(1444, 세종 26)

④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한 것은 균역법이다(1750, 영조 26).

정답> ⑤

위의 자료에 '이항 등이, 지금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은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땅하다며 송시열은 방자하게도 상소를 올려 민심을 어지럽혔으니, 멀리 유배 보내소서라고 상소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후일 경종]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1689, 숙종 15)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당시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

* 원자(元子) :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이어 아래의 자료에는 '임금이, 기사년 송시열의 상소는 한때의 실수였을 뿐 그가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는가, 이제 그동안 잘못된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기사환국 때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후 4년 후에 일어난 갑술환국(1694)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도 지낼 수 있게 된 일을 가라킨다(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두 차례이다. 현종 즉위년인 1659년에 1차 예송(기해예송)이, 현종 15년인 1674년에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났다.

②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발생한 것은 선조 22년인 1589년의 일이다.

④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성균관 앞 반수교 옆에) 탕평비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정답> ②

'이것은 (가)의 결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 대군이 쓴 한글 편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편지에는 척화론을 내세우다 끌려와 함께 있던 김상헌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병자호란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636, 인조 14).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가 동원된 것은 두 차례로 조선 효종 5년인 1654년(변급),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국경 지역에 4군 6진이 개척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1433/1434).

③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한 것은 조선 광해군 11년인 1619년 3월의 일이다.

* 사르후 전투 : 조·명 연합군이 후금[청]의 군대가 만주의 사르후에서 맞서 싸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였다. 이후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④ 정봉수와 이립이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정묘호란 때의 일이다(1627, 인조 5).

⑤ (일본과) 제한된 무역을 허용한 기유약조가 체결된 것은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